꽃망울 터지네
송인필
한낮, 나른함을 깨운 씨앗이
발가락 치세우고
방금 올라온 무늬를 피워 올리네
썩은 거름더미의 늑골 사이 사이
지독한 냄새에 박혀 있네
기습적으로 숨 쉬며
꾸루룩거리는 씨앗
일생에 한 번 박차고 날아 오를
아름다운 춤사위를 그리네
한때 좌절된 세상들, 아랫배 움켜쥐고
가장 춥고 외진 슬픔을 게워 내네
깊은 뿌릴 지닌 햇살이 씨앗 속으로 파고들어
시방, 연속으로 화단이 술렁이네
뱃속에 뭉친 생들이 출구를 여네
아나키스트를 꿈꾸며
카니발을 펼치네
반짝이는 무늬들은 늘 혁명적이네
와르르
꽃망울 터지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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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너를 빚는다, 청화무늬진사
꽃망울 물고 있는 수련으로 빚는다
중중모리, 휘모리, 온 몸 떠도는 기운
땅으로 풀며 무릎 꿇고
빚는다 너를 깨부수며 수없이 금 간 나
눈물로 너를 빚는다
빚은 너의 숨결로 넘실거리는 바다
아픔으로 터진
맨발로 오래 걸어와
불뚜껑을 연다
흙소리와 바람빛을 담아 돌아온
너의 내력을 읽는다
청자, 긴 목둘레를 감싼
흰두루마기 걸친 법화경
군더더기 없는 문장 한 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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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 국물이 튄다
짬뽕만 먹고 자란 나는 호기심이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짬뽕이므로
들이켜도 들이켜도 목구멍에 걸리지 않는
매일 짬뽕으로 안심한다
지하철에서, 도서관에서, 거리에서
내가 겪지 못했던 장구한 세월의 덕지,
달고 맵게 뒤섞인
짬뽕 국물은 깊고 얼큰하다
해독할 수 없었던 수많은 무대
실은 껄끄러운 내 시도 그 무대에 던져졌다
먼저 살다간 어느 생들이 뭉쳐
가만히 내게 튕겨온 짬뽕
들여켰을 뿐이다 실패투성이로 늘 배고픈 나는
짬뽕 국물에 젖는다
이해하지 못하고 삼켜 아프고 쓰린 목구멍 달래며
허겁지겁 배속에 채울 때
후끈거리던 내 위장을 통과하는
짬뽕 국물로 나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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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에 관한 각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똥을 제대로 싼다는 건
세상을 제대로 사는 일이야
신경줄 모아 숨을 차단하고
대장을 돌고 소장을 지나 받들어 똥!
똥에게 경배하는 거야
바쁜 세상, 때와 장소를 가릴 새 없이 싸갈긴 똥은
구린 줄도 모르는 거야
무얼 삼켰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똥을 보면 흘러 온 싸가지가 보여
똥은 똥만의 철학이 있어
빛깔이 있어
세상이 싫어 제대로 삭히지 못한 똥은
주룩주룩 볼멘 소리만 급하게 뱉어내는 거야
똥을 집어넣고 다니는 그대는 똥을
골치가 아플 때
몸에 열이 오를 때
한 번 시원하게 똥이나 싸 봐
깨끗이 깊은 공복에 든 새벽
도올 선생의 똥철학이나 읽어 봐
소가지 더부룩한 얼굴로 변비에 시달리는 낯짝
오늘은 어떤 구린내를 향긋하게 끌어 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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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바닥에 있다
냄비에 물을 붓는다
물은 비밀을 감춘 채
아무런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비밀은 바닥에 있다
잠시 후
가열된 물방울의 온몸에 열이 오른다
뜨거운 냄비는 물을 밀어낸다
툭, 툭, 열꽃을 붉히며 점프하는 물방울
저리도 세찬 분노를 숨기고 사는 줄
비밀을 켜기 전엔 몰랐다
참을성의 밑바닥까지도 어쩔 수 없어
솟구쳐 오른다
물의 한계
물은 동요하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분노, 가라앉히지 않는다
비밀은 바닥에 있다
불을 끄자 물방울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해일 뒤의 바다 되어 더 깊은 눈으로 세상 응시하는 물
아픔이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더 깊숙이 세계를 받아들일 줄
비밀을 끄기 전엔 몰랐다
모든 혁명의 뿌리는 바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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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이 문제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저류를 담아내면서 그 저류의 힘과 날카로움을 얼마나 잘 형상화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시대정신의 밝은 광채가 드러나면서 중심부를 향해 온 몸으로 돌진하는 장엄함과 예리함이 미적 구조로 살아날 때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한 느낌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감각의 회복이자 역사의 전망에 대한 성찰이기에 더 없이 값진 체험이다.
송인필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그러한 존재 전환의 한 울림을 경험한다.
-김경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