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김경성
그의 근원을 찾아가면 주름진 길의 가계가 있다
길 바깥에 촘촘히 앉아 있는 수천 개의
검은 눈이 있어
꿈속에서라도 어긋날 수 없다
단단하게 세운 성벽은 안과 바깥이 없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바깥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바깥이다
어디든 틈만 있어도 잘 보이는 눈이어서 지나치지 않는다
자리를 틀면서부터 새로운 가계가 시작된다
뜨거운 불의 심장을 꺼내 기둥을 세운 후 세상과 맞선다
처음부터 초단을 쌓는 것은 아니다
제 심지를 올곧게 땅 속 깊이 내리꽂은 후 뱃심이 생기고 꼿꼿해질 때
온 숨으로 쏘아 올리는 붉음
높이 오를수록 몇 겹으로 겹쳐가며 치를 만들고 면을 서서히 넓혀가며 하나의 성이 세워진다
상강지나 된서리 때리는 새벽
수탉이 볏을 세우고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 듯 나는 듯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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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저녁
물의 결이 겹겹이 쌓이는 저녁이 오고 있다
멀리 왔으니 조금 오래 머물고 싶다고
지친 어깨에 내려앉는 노을빛은 붉고
무창포 바다 왼쪽 옆구리에 쌓이는
모란의 결
누군가 마음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놓았는지
꽃잎 사이사이 조약돌 같은 꽃술이 바르르 떨린다
바다가 너울너울 무량하게 피워내는
모란
바람의 깃에 이끌려 꽃대가 흔들린다
초승달에 걸린 바다가
허물어진다
모란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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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가 있는 바다
오래전에 떠난 당신의 그림자가
한참이나 머물다 간다
빗물 먹은 악보가 눈물처럼 번져 있다
바다가 연주하는 곡이 건반마다 새겨져서
그토록 깊고 푸른 통음이었을까
바닷속까지 뒤집는 격정적인 연주는 당신의 울음이었을까
우는 당신이었을까
몸으로 읽은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던 낡은 피아노가 월정리 바닷가에 나와 있다
갈매기 한 무리가 피아노 건반에 앉아서
붉은 눈을 비비고 있다
교향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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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에서의 하루
귀를 막은 채 바닷가에 서 있다
길을 잃은 바람이 늙은 뱃머리에 몸을 던진다
폐업한 횟집 작은 창문으로 나를 밀고 들어온 바다가 출렁거린다
구름이 창문에 색을 입혀도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물에 떠 있는 폐선
더는 길을 나서지 않겠다는 듯 녹슨 닻을 저만치 두었다
창문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온 나도
젖은 몸속에서 눈물을 꺼내 바다에 놓아주고
귀를 열어서 보이지 않는 소리를 깊이 밀어 넣고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한다
뒤돌아보지 않는 바람이
바다를 한껏 접어 밀고 가면서
이름 모를 흰 꽃을 자꾸만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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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꽃 필 무렵
보라 등을 켠
쇄골에 집 한 채 얹고 있다
새들은 나무의 몸속을 드나들며
사리 지나 조금인 때
썰물 따라서 바다로 내려가
새로 쓰인 글을 읽어 나간다
누군가는 읽다가 목이 메었을 것 같은
꺾인 문장들이 돌기처럼 일어나
바닷물을 쓸어 당겼다가 내보내기도 하고
몇 문장은 끝나지 않는 말줄임표로 되어 있다
수많은 생각을 깊숙이 넣어두고
날마다 쓰고 있는 바다의 문장은 끝이 없다
새들도 오동꽃을 바다의 책갈피에 꽂아 두고
다시 오동나무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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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저녁>,은 <와온>,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이후 발간하는 김경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 이번 시집에 이르기까지 김경성 시의 변하지 않는 특징 중의 하나는 시가 감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시는 감정이 쉽게 드러나거나 서사를 통해 독자의 감성을 유도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묘사로 이미지를 적충하고 그것에서 정서와 사유를 직조해 내는 것이 김경성 시인의 시작법의 특징이다. 시인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등등의 이항 대립이 만들어 내는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박진희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