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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글벗문학회

김남권 2023. 12. 12. 08:31

쉼표

피미경

몇 해 더 일해야하나
오래 머물러
이별하는 방법 잊었나
아침 되면
자연스럽게 머리 감고
일터로 향한다
굽어진 어깨
삐걱거리는 손마디
오후 4시
버티던 몸 꺾인다
집에 갈까
조금 더 버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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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운제야

정유경

아이의 내성발톱 통증은 수술 후에도 오래갔다
2~3일 간격으로 아이를 태우고
제천병원으로 진료를 갔다
학교도 매일 데려다 주고 데려 왔다
또 다른 아이가 발목을 다쳤다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학교로 아이를 태우고 다녔다
저녁밥상 앞에서 워터파크 놀러간 초등학생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오니 아이들은 저녁을 다 먹고 설거지중이다
저희들끼리 재미있게 시끌벅적 중이다
배고픈 나는 내 저녁밥을 챙긴다
초등학생이 쪼르르 달려와 무언가를 요구한다
아무도 내게 '밥을 먹었느냐'고 말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
꾸역꾸역 밥 먹으면서 자꾸 화가 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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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강순구

브루스 윌리스를 닮은 남편 손끝에 매달린 마트 영수증 들여다 보는 아내의 얼굴이 무겁다

사는 건 무거운 일

백 년은 족히 넘은 건물 발꿈치
그 틈 사이로 살아 오르는 초록빛
봄 햇볕을 전신에 두르고 만족스런 몸짓이다

태국 전통 맛사지 샵을 지키는 코끼리상 옆 수국화분
이제는 여기로 집을 정한듯
아시아 여인 홀로
담배연기 따라 날라가는 마음을 잡으며
한참을 서성인다

인도 한켠 자리잡은 흙마다
의젓하게 얼굴을 들고 있는 민들레

땟국물 번질거리는 쇼핑백
입 벌린 채
쓰레기통 구멍에서 일용할 빵을 건져 올리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월척을 기대한다

마지못해 끌려나오는 유리병 플라스틱통
연신 쉰 목소리로 중얼댄다
'어디고
살아내는 건 묵직한 일이지'

연신 모두의 어깨를 감싸는 봄비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래도 봄은 좀 나을거야'라지만

구멍 난 신발을 내려다보며
오늘
고개를 젓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문득

홍지수

아침에 눈 뜨면
고요가 실루엣을 한 겹 한 겹
걷어내며 얼굴을 지운다

쌀을 씻어 첫 물은
낯선 그 먼 땅으로 흘려보내면
지상의 나무들이
언 몸을 녹이며 잎을 틔우는
이것도 사랑이라고

맑은 물이 손등을 반을 덮고
참방참방 쌀을 안치고 기다리는 동안
저편에서 이쪽으로 건네는 인사
이것은 그리움이라고

한 그루 나무가 그늘이 되고
슬픔을 알아갈 때
가지런히 차려진 아침을
조금씩 떠서 생을 채우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바다를 향해

홍정임

여덟 살짜리가 젖억이 아우를 업고
젖동냥을 해야 할지 밥동냥을 해야 할지 걱정했다고
천하에 저 혼자 세상 설움을 다 가진 듯 했지만

어떤 일곱 살짜리는 등에 업은 아우에게 젖동냥도 해 먹이고 밥동냥도 했네
그 깜깜한 세상을 반딧불처럼 살아나서
한그루 커다란 나무로 그늘이 된 이도 있네
팔랑개비처럼 늙은 하루를 보내면서 엉덩이 붙인 이 자리에 해가 들고 있다고
예순 팔순 살면서 부챗살처럼 웃네
종달새처럼 하루를 흘러가네
곧 바다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