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선
백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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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받는 봉인된 카드 청구서
톡, 톡, 톡, 절취선 따라 실밥 뜯는 소리 들린다
땡볕 마름질이 끝나면 바느질 그릇과 재봉틀 위에서
식솔보다 더 해진 몸으로 박음질을 하셨다
밤늦도록 마루 끝에서 삯바느질 하셨다
꿰매는 속도보다 뜯어지는 옷이 많아
당신의 배려는 자투리 천도 티 안 났고
골무 낀 채 주전자 쌀은 개울을 건네주었다
아무리 배를 곯아도 그땐 쫓기는 일 없었는데,
질기고 질긴 한 달을 어떻게 다스리셨을까
모든 이의 씀씀이가 똑같지는 않은 것 같다
오픈 절개선 따라 덧댄 한 달이 따라온다
사적 편의 청구서 툴~툴~ 이실직고할 때
어머니 몸소 가르침에 콧잔등 시려온다
초여름 밤늦도록 달무리가 곱다
오늘밤은 비단 치마에 목단꽃 수 놓으시는지
어머니가 돼도 어머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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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로 받은 봄
걸음마를 가르쳐준 따뜻한 남쪽
영덕 오 일 장날 버스 꽁무니
백일홍 손 흔드는 이유야 있을까만
눈물로 배웅하던 신작로를 잊을 수 없다
초경 같은 인주도 바래었는데
좀이 쓴 귀퉁이 구겨지고 얇아져
발 수신 눌러쓴 글자 밥풀로 붙여도
떨어질까 불안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바람이 몸을 뒤척이는 어스름 때,
다다른 고석정 10만 평 꽃밭에서
눈가 잔주름 같은 봉인을 뜯어보고
풀잎처럼 가만히 어깨를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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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 기호품
양말을 급히 신다가 뒤집힌 속을 본다
줄무늬 꽃무늬 수놓은 실밥들
한 올 두 올 얽혀서 곡선을 낸다
출근길 마지막 차림에 양말을 신는다
무좀, 시린 발등, 발뒤꿈치에 꾸덕 살,
엄지발가락에 무지외반증 감싸준다
티눈이 깊이 박힌 거칠고 갈라진 발
쉴 새 없는 굳은살 사뿐히 감싸려면
제 몸은 당기고 늘어져 구멍이 난다
너덜너덜 기진맥진 먹구름 냄새에도
툭 불거진 성경 한 구 같은 양말
언제나 엇박자로 가볍게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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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인
형틀의 뼈대를 쫓아 떠돌던 목수 김 씨
망치, 대패, 자귀, 도끼, 톱, 송곳, 성냥, 이쑤시개,ㅈ자질구레를 넣은 허리 주머니가
둘도 없는 친구인데 옆에 없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은 찬바람에 기우는데
걱정처럼 쌓아놓은 내수 합판이 한꺼번에 덮쳐서
허리가 나무젓가락처럼 부러졌다
나무로 시작해서 나무로 저무는 일상이
나무 목발조차 쓸 수가 없다
사고 후 덩그러니 울지 않는 전화기뿐
툴벨트 옆에 누워 일회용 도시락,
일회용 수저로 떠먹는 일용직도 될 수 없어
재활센터 구석에 너덜너덜 청구서로 있다
플라스틱 교정기속에 중심을 구겨넣고
벼룩시장 구직광고를 기도하듯이 본다
뼈대가 부러진 것은 뭘 할 수 있을까
높은 형틀이 현기증을 불러왔는데
교정기에 심은 나무엔 열매라도 달릴까
겨우내 뿌리 내려 온전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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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희 시인의 첫시집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고모가 간직하고 있었던 정신적 세계, 즉 맑고 정갈하고 덕스러운 성품을 차나무와 느티나무, 그리고 후박나무라는 우주 니무를 통해서 발견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시인이 상징하는 우주나무의 풍경이 아름답고 그윽하며 풍요로운 화음으로 가득차 있다. 지극히 깊고 아름다운 이러한 우주목과 세계수를 발견한 시인의 시적 도정이 매우 탁월하지만, 앞으로는 그러한 세계를 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앞으로 더욱 그윽한 정취의 시적 성취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황치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