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수를 놓다
민은숙
그녀는 소녀지
소녀의 얼굴로
연보라 수수꽃다리 입고 걸어다니지
낮달이 표정을 그려주고
해거름이 그녀의 손 부여잡지
어둠이 하루를 씻기고
저녁이 얼굴 두드리면
그가 그녀에게 꽃, 수를 놓지
다시 분홍 저녁처럼 피어오른 봄의 가지들
거울 속에서 그녀의 붉은 실이
사부작거리고 있지
그가 촘총히 묶은 것은
붉은 실, 그녀
여전히 향기 품은 흰 꽃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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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감기
생기를 포장한 봄이 다가온다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는
뜯을 수 없는 암호가 걸린 선물
분홍 감기가 기다린다
훌훌 벗어버린 앙큼한 나신이 눈부신
갓 태어난 꽃의 쿠마리
떨림은 천진한 아이 같아서
배반할 줄 모른다
배달 사고 난 꽃밭에서 멈춘
환상이 쓰인 편지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노란 편지지가 쿨럭이면
피다 만 봄이 뛰쳐나간다
어린 꽃들이 용감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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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남자
석거거리는 표정이 비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와 섞이지 않는 얼굴이 젖고 있다
떨면서도 버티는
찰박찰박한 그가 기울어진다
비가 스러진다
그가 뭉글어진다
달려가 안아 주고 싶은 그 곁으로
비상등을 켠 경적이 달려간다
서러운 사연들이
쿨럭 선 위에 쏟아진다
남자는 설움을 둥글게 끌어아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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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
하늘이 바다와 접속하는 그 어디쯤
그녀의 이름이 있다
웃음이 굴러가는 이름 속에서 간지러운
밀어들이 팝콘처럼 터지고
콜라의 미소가 눈동자에 박힌다
그 속으로 투신하는 눈부신 문장들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볕뉘처럼
된여울이 그녀를 부른다
물씬 젖고 싶은 계절이 그녈 불러들였다
바다의 눈썹과 그녀의 입술이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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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늘
그는 그늘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휘청이는 우뭇가사리가 저녁의 목도리를 감는다
어제의 털모자 쓰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슬며시 탈출을 감행하는 오후
모서리가 성호를 긋고 장렬하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까
천적에서 멀어지면 곤두박질치는 불안이
사위어가는 목소리로 호흡을 멈추는 순간
저만치 목소리로 호흡을 멈추는 순간
저만치 그가 되고 싶은 동백이 뚝뚝 떨어진다
그를 남겨 두고
눈물 혼자 붉은 그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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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숙 시인의 시집 '분홍 감기'는 여성의 자기 고백적 시쓰기를 통한 내적 투사를 겨냥한다. 시인의 시적 태도는 자신의 밖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 민은숙 시는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그 안에서 힘겨운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자신의 생의 형식에 대한 삶의 노래이다. 시인의 태도는 꼼꼼한 성찰과 글쓰기로 운명에 대한 사랑과 쓸쓸한 이별과 무거운 존재론적 성찰이 대등하게 놓여 있다. 융은개성화를 "우리에게 주어진 개별적 숙명을 충족하는 오직 하나의 심화적 발전 과정"이라 하였다.
민은숙 시인의 시가 갖는 여성적 글쓰기는 자연친화적이며 몸의 언어를 통해 사유한다. 시인의 자아의 거울에 비친 존재는 무의식적 세계 너머를 살피며 겨울 강을 건너고 있다. 시인의 꽃의 언어와 몸의 시학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변신 은유와 봄물처럼 찰랑이는 상상력을 경험하였다.
-이화영 시인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