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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놀다-나호열 시집

김남권 2023. 1. 29. 09:59

봄비

나호열

알몸으로 오는 이여
맨발로 달려오는 이여
굳게 닫힌 문고리를 가만 만져보고 돌아가는 이여
돌아가기 아쉬워
영영 돌아가지 않는 이여
발자국 소리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면

문득

뒤돌아 초록 웃음을 보여주는 이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토마스가 토마스에게


사랑해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배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랑의 온도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뜨거워도
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
저 노을 한 점
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
아무도 붙잡지 않는
한 자락 바람
그러나 사랑은
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으로 만들고
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
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
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
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를 태어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
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그대여
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사랑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 달려오고
사랑은 매일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것
온혈동물의 신비한 체온일 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달팽이의 꿈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구겨 넣는다
언제나 노숙인 채로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생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약육강식의 장벽을 뛰어 넘으며 용감하게 헤쳐 나가며 호위호식의 길로 뛰어나갔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생에 대한 반역이라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단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애를 내 힘으로 나의 촉수로 어루만지고 싶었다.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작은 상이나마 염치없이 받아 챙기면서도 좀처럼 문단이라는 강호에, 가히 무림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을 시림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것은 그 누구와의 비교를 거부하고 -이것이 열등감의 반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시 잘 쓰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것이 나의 시 쓰기와는 무관하다는 오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시를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대의 조류라고는 하지만 조금 얼굴이 알려지면 성인이나 도인이 되는 사람들, 그윽하게 이 세상을 내려까는 눈길을 가진 시인들에게 주눅들 일도 없고 관심도 없다. 시 쓰기를 감정의 토로나 여기餘技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유구무언이다.
-나호열의 시인의 산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