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앤드 부르스
이효애
지상의 정수리는 볕의 먹잇감
때에 따라 기울어진 골목의 햇살은
사라진 문장이라며
흔들리는 잎새에 멜로디가 따라 붙는다
바람 훌쩍 날아와 숲의 리듬을 자유롭게 탄다
모퉁이로 돌아선 자투리 햇살이
잎을 모아 바람을 가리킨다
바닷바람을 무더기로 업고 온 빌딩과 빌딩숲 사이
성글진 언어들이 공원 벤치를 기웃거리는
한낮의 리듬이 리드미컬하다
마리나타운으로 운율을 탄 바람이 순회공연한다
스무스하게 밀고 당기는 엇박자로
드나드는 살풋한 춤사위
여름에만 가능하다는 풍문
골목의 반대 방향을 우회한다
나비춤을 추는 바람의 잎새들
계절의 갈피를 휘돌아 나온 스텝이 자주
마리나타운에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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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예술이다
시간이 아침을 일으킨다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
어제로부터 연결된 죽은 시간을 부축한다
새로운 편견을 고집하는 시간이
떫은 맛을 낸다
모양도 맛도 어떠한 감각조차 느낄 수 없는
그리하여 많은 수식이 붙는다
하여 여러 형태의 무늬로 무르익어
누구에게나 고루 배분되는 형평성을 유지한다
누군가에는 무형에서 유형을
누구에게는 유형에서 무형의 제스처를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채
날마다 새로운 질문을 키우고 미래를 그린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시간을 향해
경이로움이 지배한다
영원이 복원될 수 없는 시간 그러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연출되는 삶은 예술이랄 밖에ᆢ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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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비트박스
초고속 열차가 신의 영역을 앞질러 갔다
열차 내에는 우주 공간을 넘나드는 신세계의
인간들이 극적인 언어를 발굴 중이었다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나는
한동안 추상적인 기류에 혼란스러웠다
우주를 교묘하게 감싸는 인간들의 교활한 술수에
나의 본질이 신열을 앓았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고속 열차에 올라타
난해한 테스트를 강제 실행했다
갓을 쓴 선비가 리듬을 타며 비트박스를 즐겼다
그럴듯해 보이는 신세계로의 신세계가
신세계여서 열차 안을 한참
기웃거리다가 심신을 삐었다 다시
노을이 짙게 배인 강가로 내려와
풀벌레 지긋한 바람의 길을 걸었다
여기가 신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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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존재
햇살 듬뿍 펴 말린 베란다에 앉아
바람의 움직임을 받아 적는다
가시거리로 펼쳐진 위풍당당한 기세
빌딩 숲과 숲 사이를 누비며
허공을 마구 짓밟는다
창문 열어 필요한 만큼의 바람을 불러들여
쾌적한 기류를 원했지만 여는 순간
야멸찬 발차기 세례에 압박 붕대를 감는다
바다 저 멀리 해수면을 널뛰다 온 바람은
유난히 살이 많아
광기 한 번 부리면 몸서리 절로 인다
빌딩 숲과 숲 사이로 뻗어가는 바람의 줄기
움직일수록 폭발적으로 자란다
바람의 부피는 소리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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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무해지기 위해 산다
세상 모든 것들을 불러들이는
빌딩숲에 앉아 자아를 본다
누가 저 많은 것들을 차지하고 사는 걸까
채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저 빌딩 숲의
무한 경쟁이 나를 향해 비웃는다
사는 동안
내 것을 차지하기 위해 기氣 써 본 일 없는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산다는 건
생을 혹사시키는 일이라며
물처럼 바람처럼 사는 일도 능사라고
나를 향해 일컫는다
나를 속박하여 얻어지는 명예라면 차라리
세상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원초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순수한 자아에 갇혀 살자고
위증으로 둘러싼 삶의
혼탁한 영혼을 날려 버린다
끝없는 욕망의 길로
허무의 숲은 수없이 우거지고 수없이 황폐된다
그러므로
나는 애초부터 허무해지는 연습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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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애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물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는 사물이다. 은유, 환유, 상징의 기재로 관념이나 사유의 내용을 내포한다. 때로는 추상적 관념어가 직접 시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효애 시는 언어미학의 창조보다 존재에 대한 관념적 사유에 더 무게를 둔다.
그의 시적 사유의 방향은 현실적 삶, 형이하학적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이기도 하지만, 존재와 시간의 속성이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지향한다.
시간은 끊임없는 회의와 허무를 불러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재구성하게 한다.
-최휘용 시인의 해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