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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가 익어갈 때-신순임 시집

김남권 2023. 8. 21. 09:35

귀울음

신순임

지령받은 공작원같이
주위 살핀다
좀체 주파수 잡을 수 없다
암호 해독하려는
안면근육
죄다 차렷 자센데
다음 지령 날아든다
숨소리 죽이는 신경 사이로
간헐적 망치질 더 빨라질 때
검거장 날려
일망타진하는 타이레놀

암호 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줌마


미뤘던 모시 한복 풀 먹이고
다림질하는 한낮
면티 해바라기 가슴팍 착 엉개붙어
고인 땀방울 빨아내는데
콩국수 시켜놓았다는 지인 전화
입은 대로 뛰쳐나갔더니
골프웨어 입은 중년 부인 옆자리
앉고 보니 양말 구멍 꽤나 크다

콩국수 한 그릇 비울 동안
대자리 앉아 눈 내리깐 샤넬 가방 피해
치마 속 숨어 에어컨 바람 쐰 엄지발가락
쥐 내려도 찍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읍내라 깔본 심보, 수백 번 더 나무라고
지인이랑 옳게 눈 못 맞추고
사거리 신호까지 어기며 당도해
패댕이 친 양말
세탁기는 애기 다루듯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입당원서


애주가와 마주하는 저녁상
반주로 받은 막걸리
갱년기 앞 감주 되는데
든 자린 표 없어도
난 자린 표난다는 말로
막내 빈 자리 확인하며 입술 축이지만
한 잔 못 벋어나는 반년이
고개 숙여 만망함 포장하는데
남편의 아쉬운 눈빛 포기 잊은 어느날
한 잔의 경계를 넘을락 말락 할 적
안주 없다는 핑계로 내려놓았더니
소금 중발 내민다
탁주의 진정한 안주 입증하는 물증으로
꾼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농담 아닌 농담 앞
구운 소금으로 입가심하며
주당酒黨에 입당원서 제출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풍선껌


잠 덜 깬 아이 마른입에
간장 비빈 밥 한술 물리고
급하게 자동차 운전대 잡는데
안개가 삼켜버린 마을 다리 위
중년 여성 넷이서 이정표 확인하며
여유있게 담배 피우기에
양동마을은 목제 건물이 많아
금연이란 말 떨어지기 무섭게
"쓰미마셍"한다

한 바퀴 돌고 오는 분통골 입구
초가집 배겸으로 사진 찍는
그 여인들 유창한 우리말

푸욱 불어 터트리는 바람 풍선
허공 가득 채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반성문


단오 지난지가 언젠데

분통 같은 집 틀어박혀
맨날 먹고 싸고 먹고 싸
댓돌 위 똥탑만 높이기에
야, 이놈들아
나가서 똥 싸면
어데 덧난다더냐
큰소리로 나무란 뒷날
제비 오 형제 외출하며
문지방 얹어둔 문학지 표지 위
보랏빛 속내 까맣고 희게
휘갈겨 놓았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순임 시인은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 등록과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 고택 무첨당의 안주인이다.
따라서 신순임 시인이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은 양동 물봉골 이야기와 친정인 경북 청송 불훤재 종택 안분당을 중심으로 한 고향 마을 사람들 이야기, 즉 시가와 친가의 사람 사는 모습과 미풍양속 기록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와 가슴에 품어오기만 했던 자연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진경산수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경상도에서 특히 청송, 안동 지방 토박이말들이 다정다감하게 들어앉아 작품 감상하는 재미와 전통음식의 재현으로 우리 민족정신을 한껏 북돋우고 있다.
-허형만 시인 목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