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풍경
이준관
빨래를 거둬들이며
여자는 먼 들길을 바라본다
삽을 어깨에 메고
남편이 돌아온다
풀꽃을 따며 놀던 아이가 돌아온다
소를 앞세우듯
기인 그림자를 앞세우고
들에서 집까지
저녁놀이 아름다운 길을 놓아준다
여자는 처마에 불을 켠다
제집인 양
저녁별이 모여든다
풀벌레들이 모여든다
밥솥에서 밥물이 조용히 끓고
토닥토닥 도마질하듯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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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 직장에 가고
다리를 건너 시장에 간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많은 다리를 건너왔다
물살이 세찬 여울목 징검다리를
두 다리 후들거리며 건너왔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삐걱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왔고
큰물이 지면 언제 둥둥 떠내려갈지 모르는 다리를
몸 휘청거리며 건너왔다
더러는 다리 아래로 어머니가 사다 준
새 신발을 떨어뜨려 강물에 떠내려 보내기도 했다
내가 건너온 다리는
출렁다리처럼 늘 출렁출렁거렸다
그 다리를 건너 도회지 학교를 다녔고
그 다리를 건너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지만
나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고
가족들이 건널 다리가 되어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건널 때면
성자의 발에 입을 맞추듯
무릎을 꿇고 다리에 입을 맞춘다
아직도 험한 세상 다리가 되고 싶은
꿈이 남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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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트럭에 사과 상자를 가득 싣고 와 파는
저 뜨내기 장사꾼 사내에게도
운수 좋은 날이 있다
몽땅 떨이로 사과를 팔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몽땅 사 갔다
사과를 팔랴
돈을 받으랴
사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과를 다 팔고
힘차게 시동을 거는 트럭 위에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흰 구름이 돛처럼 하늘에 걸렸다
제발 저 사내의 삶이
순항이기를 ᆢᆢ
나는 돛처럼 두 손을 모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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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한 봉지
저녁에 콩나물 한 봉지 사 들고
여자가 간다
서쪽 하늘에 돋아난 저녁별도
집집마다 켜지는 저녁 불빛도
저 봉지 속의 콩나물이다
어디선가 개가 콩콩콩 짖어대고
천장에 머리가 닿도록 아이들이
콩콩콩 뛰는 소리 들린다
물 묻은 손으로 콩나물을 다듬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엉덩이도
토닥토닥 두드려 줄
여자의 손에 들린
콩나물 한 봉지
콩나물은 천장의 노오란 전구로 매달려
밥상을 비추고
콩나물 한 그릇 먹고 아이들은
콩나물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콩콩콩 자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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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녹는다
강물 얼음이 녹는다
꽝꽝 언 얼음이 녹는다
얼음이었을 때는
돌멩이를 던지면
탕, 탕 튕겨내더니
얼음이 녹으니
돌멩이를 품에 품는다
피라미 붕어 새끼
품에 품고
물총새 청둥오리
품에 품고 흐른다
갈대의 얼었던 뿌리도 녹이고
강마을 아이들
얼음 박힌 발도 녹이고
강물은 스스로
깊어지고 넓어져서
꽃 피는 산 하나
품에 품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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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는 광화문 글판에 선정된 시 '구부러진 길'로 널리 알려진 이준관 시인의 시집이다. 시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힘과 위안을 주는 따뜻한 감성의 시집이다. 소소하지만 소중한 일상과 자연 속의 평화롭고 행복한 풍경, 그리고 천진 무구한 동심과 정겨운 고향의 풍경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
시를 통해 행복과 희망을 주는 일이 자신의 소임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거칠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고 싶은 시인의 꿈이 소담하게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