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는 사랑하는 사이다
정 령
조각달이 구부러진 언덕길 지나
구름 뒤에서 내려온다
새들이 놀다간 전선줄에
가만가만 가다가 모로 앉는다
보다 못한 구름 툭 치며 말 걸어도
노란 궁둥이 씰룩인다
한 곳에 북 박아놓고 보름밤
살 냄새 지긋이 맡는 듯
한 소절 아리랑 콧노래 부르다가
두 소절 아라리요 듣다가
기다린다는 부푼 몸이
바람에 실려 오다 전선줄에 걸리고
보고 싶다는 처진 눈빛이
달의 오금에 매달려 흔들리면
달 토끼 덩더꿍 달뜬 공이질에
시나브로 둥둥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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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어둠이 빚은 달이 잘게 부서지면서
잔 별꽃을 만든다
달로 빚은 별꽃들이 은하에 쓸려서
대지를 내달린다
은하에 쓸려와 풀이 돋고 잎이 나며
어둠의 꽃이 핀다
어둠의 꽃들이 달이 낳은 별꽃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은다
주위의 모든 것들은 너를 중심으로
돌다 돌아 나온다
혼탁한 중심이 흔들리면 너를 중심으로
어둠은 부서진다
아늑한 그곳에서 도르르
어둠의 부스러기들이 흔들린다
너의 중심이 흔들리고 너는 흔들리며
어둠을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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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꽃잎에게
꽃잎을 등지고 돌아선 나비를 보았습니다
긴 그림자가 돌담 사이로 사라져가고
고샅길에는 그렁그렁한 꽃잎들이 떠다닙니다
노란 달이 그루잠 들기 전에
구름이 다가와 꽃잎에게 말을 건넵니다
꽃잎이 이슬방울로 구름의 말을
대롱거리며 주워 담습니다
꽃잎 하나하나에 고맙다
구름의 말들이 대롱거립니다
끌끌한 꽃잎 또 보자
무덕지며 고개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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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흰 토끼가 풀숲에 발라놓은 꿀을 핥아 먹는다
검은 토끼 한 마리도 신이 나서 핥아 먹는다
흰 토끼도 검은 토끼도
눈이 붉어지도록 핥아 먹는다
지구를 온몸으로 끌고 뱀이 다가온다
꿀을 핥아 먹느라 꼬리가 없어진 걸 모른다
꿀을 핥아 먹느라 뒷다리가 사라진 줄 모른다
꿀을 핥아 먹느라 앞다리가 사라진 줄 모른다
흰 토끼 검은 토끼의 머리를 얌전하게 삼킨다
풀숲 뱀들이 밤새 축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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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바람
꽃들이 놓인 창가에
바람이 솔솔 불어옵니다
행여 고운 꽃들이 꽃바람 들까
창문 살짝 열어 그만 오라 나무랍니다
그 바람 시샘할까
바람 없는 창가에 옹기종기 모아 둡니다
꽃들이 놓인 창가에 바람은 나 몰라 하고
마냥 꼬드기며 달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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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 시인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시인이다.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과 식물, 심지어 무생물과도 소통하며 그 대상을 정령화하여 이미지를 구축해냈다.
또한 이 시집 '구름이 꽃잎에게'에서 자신을 낱낱이 드러낸 깨복쟁이가 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 앞에 당당히 맞서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실존을 위한,
-박희주 시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