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 강
박재삼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 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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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바람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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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미지수
저 나뭇잎이 뻗어가는 하늘은
천날 만날 봐야
환장할 듯 푸르고
다시 보면
얼마나 적당한 높이로
살랑살랑 미풍을 거느리고
우리 눈에 와 닿는가
와서는, 빛나는, 살아 있는, 물방울 튕기는,
광명을 밑도 끝도 없이 찬란히 쏟아놓는다
이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쉰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했지만
그러나 그 정체를 잘 모르고
가다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반쯤은 명상을 통하여 알 것도 같아라,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보면
또 다른 미지수를 열며
나뭇잎은 그것이 아니라고
살랑살랑 고개를 짓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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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을 보며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바닷가에서 자라
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
생선을 낚아 회를 쳐 먹었던 것,
햇빛에 반짝이던 물꽃무늬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
이런 것이 달래 창자 밑에서 일어나는 미풍
가볍고 연한 현기증이 이기지 못하누나
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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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속의 아이
풀밭엔 풀밭 소리, 못가엔 또 다른 소리,
봄 하는 소리는 헤아리기 어려운데
한자락 끝이나 잡는 노는 아이 창가여,
돌돌돌 도랑물 소리 이어진 그 구슬이
창가 소리 속에 몇 가닥은 흘러들어
기승한 목청을 끌고 갈 데까지 가 본다
창가와 함께 달리던 아이는 쓰러지고
스미는 풀 냄새 흙 냄새 아뜩한데
창가를 그친 대목에 종다리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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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개성적 활용, 전통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삶에 대한 꾸밈없고 솔직한 태도 등은 일찍이 우리 시에는 유래가 없었던 그만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토속적인 정서에도 강한 애착을 보였는데,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닿아있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되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의 시의 바탕인 투명하고 맑고 잔잔한 자연 친화적인 세계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이 가는 평명한 시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김명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