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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첫 별이 뜰 때-문진섭 유고 시집

김남권 2025. 7. 6. 08:23

할머니의 장맛

문진섭

할머니의 장맛에는
손 없는 날
첫 별
떠오를 때
정갈한 마음을 담아
고수래를 담은
정성스런 발걸음이었다
장독 뚜껑에 내린 안개를 거두어낼 때
할머니는 꺾인 허리춤에 흰 헝겁 차고
삼신할매 모시는 듯 정성을 다하면
그때야 장독은 숨을 쉬며

온갖 정성을 담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초저녁 첫 별이 뜰 때

별은
뜨는 것이 아니라
밤이면
피어나는 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그대를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인연이다

바다보다 깊은
천리 밖

저녁 첫 별이 뜰 때

세상 칸 칸마다
맑디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나는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동백

봄날

수술실에 누워 마취주사를 맞기전
딱, 그때 떠오르던 노산공원 동백꽃들

온몸에 비늘을 덮고
마취 바늘을 달고 있는 내 몸속을 헤엄치고 다닌다

동백꽃 파편들이 은물결처럼 부서지며
수술실 천정에 날아다닌다

아내 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고
남의 호주머니를 넘보지 않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고분고분 살았다

점점 억울한 생각이 드는 봄날
수술실에 누워서야 봄을 본다

박재삼문학관 앞 흰동백들이
내 몸을
밝히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문진섭의 시를 보며 문득 베르돌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떠올랐다. 이미 우리 곁에 없는 문시인의 유고 작품들을 접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내색하지 않고 지역에서 시낭송과 시극 공연을 활발하게 해왔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른다. 그런 것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남은 동료 선후배 문인들을 숙연하게 하면서 동시에 살아남은 이들에게 슬픔을 느끼게 한다.
-예시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