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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송은숙 시집

김남권 2025. 1. 23. 08:26



송은숙

팔꿈치 안쪽에 실핏줄이 터지듯 천천히 멍이 드는 저녁이다

무의 발자국이 밭두둑을 넘어왔다
무의 발자국은 서걱서걱 얼음 갈리는 소리를 낸다

무를 깎는 소리가 그랬다
매끄러운 얼음을 지치듯 껍질 밑으로 칼이 들어갈 때
부엌문으로 무심코 하늘을 보다 낮달에 손을 베일 때
껍질과 칼의 경계에 드는 소름

껍질 밑으로 무의 실핏줄이 드러났다
오래 동여맨 손가락처럼 하얗게 질려 있다

집요한 서걱거림에 무가 제 몸을 열어 보았다
빈집의 들창처럼 숭숭 바람구멍이 나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머의 너머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박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개를 발굴하다

안개가 뒷산을 지우고
도시 전체를 덮고 있다
화산재 덮인 폼페이처럼
어느날 우리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는지 몰라 정처 없을 때
갑자기 안개가 내 손을 잡고 간다
거기 안개의 가슴이,
안개의 눈동자가 있다
안개의 가슴속에
안개의 눈동자가 있다
분묘를 밝히는 장명등처럼
셀룰로이드로 보는 태양의 눈빛을 하고
우리는 눈동자를 따라 안개의 가슴속으로 간다
상석 위에 켜겨이 쌓인 낙엽을 끌어모으며
매몰된 메트로폴리스를 발굴한다
발굴은 삶이 어땠는지 밝히는 일
벽을 더듬고 문설주를 당겨 본다
안개의 트램펄런
안개의 테니스코트
안개의 학교 운동장
안개의 공을 차서 안개의 유리창을 깨뜨린다
태양이 떠오르고 도시가 발굴되었다
도시는 갑자기 명랑해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엇보다 송은숙의 매력은 직관과 지혜를 담는 심장에 있다. 열두 개의 심장을 얻은 시인은 열두 가지 색을 안고 모든 사태를 바라본다. 무의 실핏줄을 발견하는 것이나 황톳길에서 밟은 병뚜껑이나사금파리에서 날카로운 적의를 읽는 것은 시인의 직관이기에 가능하다. 직관의 힘으로 멍이 상처가 아니라 전사의 후예라고 명명하며 틈을 빠져나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음을 사랑한다는 지혜임을 깨친다. 이제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면 열두 심장을 가진 시인이 어떤 아름다운 언어를 타전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제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