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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서 미안해-한기옥 시집

김남권 2025. 1. 15. 09:29

문 여는 사람

한기옥

넌 내게
살며시 기댈 뿐인데
요새 뭐해요?
말 거는 것 같고
넌 내게
가늘게 웃을 뿐인데
말 못할 걱정 있어요?
묻는 거 같고
넌 기침 소릴 낼 뿐인데
고라니 꿩 토끼 노루 까치...
손뼉 치고 춤추는 모습
섬광처럼 일었다 지고
눈 떠서 잠들 때까지
곁에 내가 있잖아요
땟물 찌든 마음 자락 보얗게 빨아
대기권 바깥에 널어줄게요
오래도록 살고 싶게
주문을 거는 사람
넌 새끼 오리처럼 걸을 뿐인데
나를 옥죄고 있던
문이란 문들 활짝 열리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좋아해서 미안해

아이가 안골 집에서 우렁이 한 마리를 잡아 상자에 넣어 시내로 가지고 나가던 날
차 안에서의 일이다

예쁘고 착한 우리 기선이한테 붙잡힌
우렁이는
행복하겠네

할머니 얘는 사실 불행한 애예요
풀숲이나 들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하는데
나한테 잡혀 갇히게 됐잖아

파주집으로 데려가기로 해서 미안해
내가 널
좋아하게 돼서 미안해, 미안해

상추를 갉아먹었는지 살피는
아이 얼굴에
먹구름 짙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작은 거인

뭘 먹을래?
잘 잤어?
뭐 하고 놀까?

아이 앞에 가면
못을 치고 문고리를 닫아걸고 오래 눌러두었던 말들이
근질근질 밖으로 나가고 싶어 몸을 비틀다 툭툭 터져 나간다
두어 문장 오가던
부글거리는 생각들이
가라앉고
세상을 원망하던 맘 사라지고

너 때문에 내가 산다
고개 끄덕이게 하는

저 작은 거인을 뭐라 불러야 하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번 시집은 잠언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할머니의 사랑 가득한 한 권의 잠언, 이 얼마나 참다운 이야기인가. 세태가 빠르게 변하며 가족관계도 상상 이상으로 변질되어가는 요즘, 한기옥의 시편들은 가족 사랑의 노래가 되어 세상 도처로 날아가게 될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어린 화자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가족 간 소통과 사랑을 읽어낼 수 있는 시집이다.
-박제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