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선풍기
정리움
창밖 전깃줄 까마귀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눈이 내린다
속을 채울 속을 만들어 만두를 빚는다
까마귀 날갯짓 소리에 밤이 쌓인다
빚은 만두가 날아오른다
꼭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죽어서도 빛이 나는 것들이 있지
봉안당의 벽에는 나비들이 붙어 있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죽음의 냄새가 사라진다면
눈이 내리는 오늘 밤, 베란다 창고에 넣어둔
선풍기를 꺼내야지 속도를 최고로 쉼없이 돌려보는 거야
죽은 사람들은 왜 날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까
하얀 김이 앉은 성에는 까마귀를 먹고
시간은 만두를 빚던 손을 먹고
밤은 달을 먹고
달은 선풍기 바람 앞의 나를 먹고
눈이 내린다 하얗게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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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잎과 잎이 손을 잡고 숲을 이루었다
간격이 좁은 나무들의 옆구리에 바람이 깃든다
비가 와도 빚은 구름 뒤에 있는 거지
없어지는 것은 없다
천만 가지 생각으로 도열한 나무들
늙은 칸트 씨가 나를 흘깃 쳐다본다
얼굴을 가린 마스크가 휙,
나는 나무들 쪽으로 비켜 걷는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빛이 정면으로 꽂힌다
선명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나온 길, 나를 뚫고 간 길
내가 머문 바람, 나를 불고 간 바람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물 고인 하늘에 얼굴이 비친다
물러서서 돌아갔다
물 먹은 잎들이 나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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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말이 쌓인다
한 말과 하고 싶은 말과
하지 못한 말이 쌓인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를 잃고 떠돈다
떠도는 말은 스스로 소멸하고 싶다
관계를 잃는다는 것은 시간이
저편으로 넘어가는 일
담장 위 고양이의 붉은 눈빛이
어둠을 뚫고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잠시 발을 뗄 수 없고
얼어붙은 말들이 해동되지 않는다
약속은 어느 시간에 다른 얼굴이 된다
말을 잃어버린 사이에는
없는 시간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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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있습니다>는 정리움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형식적으로든 매우 다른 경향의 시들이 공존해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감정이나 욕망 등을 특별한 시적 장치 없이 묘사한 시들이 있는가 하면 사물의 감각화로 팽팽한 시적 긴장을 유발하는 시들도 있고, 순일한 서정적 합일을 그리고 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냉소적 시선으로 핍진한 현실을 묘사한 작품도 있다. 경험적 사실을 있는그대로 서술하는가 하면 사변적이거나 환상적 이미지를 개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정리움 시인의 시에서는 일상과 죽음의 의미의 두 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는 관계를 통해서, 곧 자아와의 관계, 타자 혹은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그의 시에서 시적 자아는 세계와의 서정적 동일성을 끓임없이 유보하며 불화의 상태에 머무는데 서정적 동일성을 그저 싶었다, 좋겠다, 그런 날이, 등에서와 같이 염원이나 가정의 형태로만 구현될 뿐이다. 이는 시인의 관계 맺음에 대한 진심, 한번 맺은 관계에 대한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박진희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