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에서 베틀을 읽다
-천지연 폭포에서.
강병철
하얀 함성이 펄럭이는 무명천 자락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로 직조되었다
허공을 가른 햇살의 파동을 날실 삼아
물방울이 씨실이 되어 짜낸 깃발이다
암벽 베틀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햇살은 흩날리는 물방울을 안고
물방울은 햇살에 스며들며
꼬이면 풀고, 풀리면 서로 그러안는다
순간은 영원이 되고, 영원은 순간으로
아무도 떼어낼 수 없는 포옹
푸름 속 눈부신 절규로
지축을 향해 맑은 천을 짜 나간다
허공과 지축을 잇는 무명천의 기도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함성
천만리 먼바다까지 짜 내려가
물처럼 살지 못한 이들 눈 감을 때
구름되어 눈물 흘리겠노라고
그 눈물 방울방울 씨실이 되는 날
폭포되어 돌아오겠노라 펄럭인다
*제19회 푸른시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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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 벼랑에 서다
-서귀포 중문 주상절리
수축의 중심점에 응고된
육각기둥 침묵의 모서리가
날 선 검처럼 차갑다
서귀포 중문 지삿개 바닷가에서
고래들 자유로이 노니는
멀고 먼 푸른 수평선까지
달려 나갈 수 없는 수직의 기다림은
파도에 할퀴어 우는
벼랑의 검게 굳은 가슴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절벽으로 느껴지는 날
파도 소리에 울음 묽혀
홀로 마냥 울고 싶어
나만의 그 바닷가를 찾아
파도가 되고 싶을 때
주상절리 그 바닷가 벼랑에 선다
앞 단추를 후드득 열어젖히고
아찔한 암벽에 서서 바다를 마시면
거품으로 흩어지는 버리지 못한 꿈들
파도를 따라와 암벽 모서리에 부서진다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손길
움츠린 어깨를 포근히 감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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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따라잡기
수천 깃을 세워 허공을 날며 내려다 본다
날개 아래 펼쳐진 세상은
모두 나의 것
부러울 것 무엇이랴
날개를 뻗어 더 많은 것들을 끌어당긴다
양 떼가 되었다가
코끼리 떼로 부풀어 올라
이제 더는 날 수 없는 몸
모두 버리고 하늘을 떠나야만 할 때
주룩주룩 눈물이 흐른다
죄다 내려놓고 실컷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어린 초목들의 등을 토닥이고
목마른 산야를 돌고 돌아
바다의 품에 안긴다
한 방울의 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신은 그에게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가벼운 날개를 달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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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나비를 꿈꾸는 자의
눈물에서는 아린 냄새가 난다
애벌레로 살다
눈부신 날갯짓으로 활공하는 시간은 짧다
기어가는 생은 길지만
날아가는 생은 찰나刹那다
순간瞬間을 나는
나비의 꿈은
화려한 슬픔이다
석양이 붉은 휘장을 내리는 것은
흩어진 날개를 모으고
활공하는 찰나의 삶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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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것의 중심을 탐색하다
둥근 것들의 깊은 중심엔
불꽃이 사는 방이 있다
그 방의 적막 속에서
씨앗은 제 살을 태워 향을 피운다
모든 둥근 것들은
그 불꽃을 피우기 위해
아낌없이 제 몸을 사른다
사과가 상큼한 맛을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중심에 향기로운 심지를 밝히고 있음이다
모나거나 둥글지 않은 것에는
향기 나는 씨앗이 자랄 수 없다
미소 짓는 둥근 뺨이 어여쁜 것도
기쁨의 씨앗이 움트고 있기 때문이며,
그대 눈빛이 맑게 빛나는 것도
눈망울 중심에 눈동자가 있기 때문이다
젖을 물린 엄마의 둥근 가슴을
다소곳이 말아 감은 아가의 손
그 둥근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불꽃 하나,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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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시인의 많은 작품은 물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팔 할이 물인 사람에게 물은 생명을 이어가는 식음료의 근본이 되는 소재로서 삶의 양식을 생산해 주는 요체라고 볼 때, 물은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생물에게 최상의 가치를 지닌 물체임이 틀림없다. 사람이 물을 사용하고 복용하며 물 가까이 존재하지만, 물은 투명하고 변화무쌍하여 예술적 작품이나 특히 물에 관한 시는 명작으로 창작하기 여간 쉽지 않다. 따라서 강병철 시 여러 편에 그 물이 주체로 등장한 점은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김필영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