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의 저녁
정우영
둘은 모녀간일까 길가에 놓인 운동기구를 타며 정답게 속삭이고 있다 지나가던 내 귀가 주욱 늘어나 두 사람 주변을 서성인다
이따 집에 가서 전 부쳐 먹자 비도 설핏 다가들고, 엄마 여기 오기 전에 저녁 드셨는데? 고기에다가 맛있게 내가? 내가 밥을 먹었어? 근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냐
들은 말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일까 걷는 내내 접힌 귀는 우울에 빠져 있었다 집에 다 와가는데도 처져 있어 귀에게 전했다
집에 가서 전 부쳐 먹을까? 귀찮다는 듯이 귀가 달싹인다 환영이야
환영과 환영* 사이 갈림길에서 서늘해졌다 안녕과 불안이 동시에 튀어나온다
*늘그막에 환영歡迎에는 환영幻影이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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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시계
-경주에게
아내 임종을 못 지켰어요 형, 옷 갈아입으러 돌아와 신발 벗는 참에, 숨 놓을 것 같다는 전갈이 당도하더군요 이승에서의 그녀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오열을 참으며 아내 손때 묻은 벽시계를 바라봤지요 오후 다섯 시 오십오분 입디다
부리나케 나가는데 등이 뜨끈해졌어요 누굴까, 뒤돌아보니 시계가 깔딱거리는 중입니다 아내와 함께 적멸인가 잠깐 아득했지요 묻을수도 없고 내다 버릴 수도 없는 뻐꾸기 시계, 참담하게 늘어진 며칠이 지나 가만히 쓰다듬었는데요 얘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예요 오랜 슬픔에 잠겨 있다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 딴에는 부지런히 손발을 놀립니다 이 시계는 혹 알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이 생을 지워 또다른 시간 속에 접어들었음을, 그리하여 이제는 갈라진 우리의 시공간을 한꺼번에 껴안고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가끔씩 정시도 아닌 때 튀어나와 울어대는 건
뻐꾹뻐꾹. 아내가 보내는 안부일 테지요
그때마다 작은애는 엄마가 돌아왔다고 호들갑이고
큰애는 저거 맛이 갔으니 갖다 버리라고 성화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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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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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시는 아름답고 쓸모없는 참견
돈의 논리만 유용하다 떠드는 세상에 자꾸 끼어드는 망초꽃과 동백과 햇살밥의 환한 고요
그에게 시인은
해진 삶의 옷을 걸치고 가는 모든 이를 쫓아가서
그 옷들을 대신 걸치고 갓 지은 시의 옷을 벗어주는 사람
그러니까 시는 먼지의 사랑이다
어떤 견고한 고통도 먼지가 될 때까지 돌보겠다는 맹세
그 영원하고 순한 사랑을 믿는 이가 정우영 시인이다
-진은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