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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들-이송희 사설시조시선

김남권 2024. 5. 27. 07:13

눈보라

이송희

  당신의 계절은 으슬으슬 추웠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 빈속을 헤집고 다닌 해고 문자 알림 소리 밤새도록 휘날린 한기에 떨었지 문밖에 선 채로 눈사람이 되었다가 눈 밖으로 밀려날까 얼음이 되었다가 입 안에 머금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셨어 아이는 집안에서 홀로 울고 있었어 기한을 훌쩍 넘긴 독촉장을 모아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다 털어 넣는 알약들, 흘러내린 슬픔마저 얼어붙은 밤이 가고

  허공에 흩날린 꿈도 다 사라진 겨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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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동화를 읽다

  결말을 알았으나, 덮을 순 없었어

  거칠고 긴 줄거리는 이면에 가려져 괄호에 말을 가두고 두려움을 삼켰지 빛나게 해준다는 틀에 박힌 문구는 오히려 식상해서 오래전에 잊었어 입술이 뭉개진 계약서를 만지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린 별은 빛났어 빛깔 좋고 향기 좋은 말이 맛집 반찬처럼 깔려있는 당신과 계약이 손발을 묶었어 위태롭게 목줄을 달고 별의 입을 틀어막고 누군가 끌고 간 사이 해는 밝게 빛났어 잘려 나간 말머리가 휴지통에 버려진 밤

  우리는 갈 곳을 잃은
  문장을 꺼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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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사들

  그들과 저들 사이 내 자리는 따로 없다

  부여의 사출도四出道인가,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천한 우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그녀가 읽어가는 수첩 속 문장에선 우리는 또 저것들과 이것들로 흥정되고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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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명사'의 호명이 여는 부름에 이끌린다. 이때 주체는 파편화된 주체가 아닌 생의 추위로 인한 얼어붙음을 통해 순간일지라도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에 "얼음이 되었다가 입 안에 머금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시는 주체가 되어 "당신의 계절"(눈보라)이 여전히 나와 같은 추위 속에 있는 시간임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순간의 주체들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동시에 사라짐을 뒤로 하고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현현 속에서 당신의 지평을 주체가 함께 살아내는 계절로 불러온다. 이때에 호명되는 주체의 이름들은 그런 점에서 타자들과 교차하고 있다. 주체와 타자의 교차는 전통적 시간과 지금 여기의 시간의 언어를 틈입시키며 교차시킨다. 이송희의 이러한 이중적인 교차가 바로 이송희의 사설시조가 도달한 언어적 지평이다.
-김학중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