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글
고경숙
글에도 걸음이 있다
눈 뜨자마자 읽는 詩 한 편은 묵정밭을 지나 들길을 산책할 때의 속도로 나른하다 걷다 눈에 띄는 들풀이 있으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시냇물 건널 땐 폴짝 리듬을 타고, 시의 걸음은 비교적 완보다 거친 유세 문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발을 삐기 십상이다 경사가 심하고 뾰족한 바윗길이어서 보폭을 줄이고 신중히 걸어야 한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며 일기를 만난 적 있다
관절염으로 ㅇ자가 되어버린 엄마의 일기는 몇 발짝 가다 쉬고, 한숨 몇 번 쉬다 걸었나 보다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내용은 반복이다
내 걱정은 ᆢᆢ마라 ᆢᆢ 밥은 ᆢᆢ꼭 ᆢᆢ 꼭ᆢᆢ
챙겨 먹고 ᆢ ᆢ
보내준 ᆢᆢ 돈 ᆢᆢ 고맙고 ᆢᆢ 미안 ᆢ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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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을 거닐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각광을 받았다
빛나는 것들을 위해 주변은 어두워야 했고
시간은 볼모가 되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삼족오의 후예는 권위의 상징으로 땅끝마을 갯벌을 뒤지던 초로의 아낙은 언약과 보은으로 이 빛나는 붙이를 지녔으리라
어둠을 채굴하면 빛이 되고 빛을 채굴하면 권력이 되는 종속의 관계
폐기의 수순을 밟는 순간부터 광산은 한낱 동굴이 된다
은밀하고 습한 곳은 쥔자와 굴屈한 자가 알아서 구분돼 굴한 자는 그곳에서 저항의 죽창을 깎고
쥔 자는 은밀한 학살의 장소로 썼다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영광과 오욕을 지나오며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없는 잡초투성이 폐광 입구에
우연히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서늘하게도, 폐광은
사람의 한 생과 닮았다
반짝이는 꿈을 좇아 쉼 없는 노동을 했고
닳아빠진 육체 숭숭 뚫린 뼈의 길처럼
허리 펴지 못한 그곳에서
공습을 피해 굴댕이가 태어나고 게서 자랐다
반짝이는 것은 누구의 영광이었단 말인가
물소리는 끊임없이 모스 부호처럼, 말한다
역사의 조력자로 억겁을 살아온 폐광은, 읊조린다
반짝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굴댕이:피난 중 굴속에서 낳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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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집사와 봄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꼬리를 흔듭니다
남자는 일어섰습니다 예식장에도 들어가 보고 초등학교 열린 교문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 파랗게 싹이 나오는 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점심상 차려놓은 지가 언젠데 안 온다고 '솔' 톤으로 약간 격앙됐습니다 미나리무침과 쭈꾸미숙회입니다 꽃무늬 앞치마를 펄럭이며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잘 만났다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우편물을 건넵니다 시집입니다
우체부가 지나가고
여자가 집에 들어가고
남자가 대문을 괴어놓고
그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마당을 사뿐히 건너 부엌으로 갑니다
부뚜막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부엌문 너머 낮술 얼큰한 남자에게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남자는 대답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발가락을 까닥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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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울다
돌아보지 않아도 슬픔의 최전선이다
시장통 외진 골목을 걸어가며 우는 뒷모습은,
셔터에 밀려 버려진 가게 문짝들
드럼통과 생선 상자들로 굴곡진 벽
기댈 곳도 잡을 곳도 없다
바닥에 낙엽 한 장 굴러와 쌓일 형편도 아닌 그곳,
앞만 보고 걷다가 하수도 배관에 걸리고 마는 골목,
그곳은 이미 여러 번 고꾸라져 본 이들과
기댈 곳 없어 주저앉던 이들이 지나는 길,
늘어진 전선들이 노을 속에 엉켜 있는 저녁
울며 걷는 사람에게 길은 길이 아닐 때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보아온 골목은
어쭙잖게 훈계나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가
슬픔을 밟고 지나가도록, 견디어주도록,
그리고, 다 지나간 다음
뒹구는 생선 상자를 제자리에 쌓고
여전히 골목의 끝이 큰길에서 보이지 않게
외진 길로 돌아앉아 있는 것,
구부러진 시장통 골목은 막다른 이가 찾아가는
시장통의 공소空所, 슬픔의 최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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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위기, 찌르레기
마치 오늘만 살고 갈 것처럼 젊은 남자가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또 한 남자가 에미애비도 없냐고 소리 소리 지르는 걸 보니 연장자다 싸움판에서 더는 나이는 무기가 아니다 논리도 무용지물이다 목소리 큰 놈과 힘센 놈이 우세하다 그리고 맞는 놈이 이긴다
지금 창밖은 서부활극, 밑도 끝도 없이 술집에서 스친 자에게 총질해대는 것처럼 21세기 도심 한 복판에서 쳐다봤다고 싸움이 났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주인공 주변으로 거리를 두고 빙 둘러섰다 구경했다
경찰차가 오고 두 남자가 함께 떠나자, 분위기를 다시 술판으로 돌리느라 바이올린을 신나게 켜대던 악사처럼 보도블록 교체하던 포크레인이 다시 움직이고 사람들은 목격담에 살을 붙이며 용감해졌다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 그제야 나도 창밖을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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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의 6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은 폭력에의 저항의지가 기록된 보관소와도 같다. 다크 튜어리즘 여행처럼 불편한 진실이 시집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폭력의 시대로 규정한 것처럼 일상화된 폭력은 우리에게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 고경숙의 시집은 이 시집에서 권력장의 구조와 일상화된 폭력의 정황을 노련하게 포착하고 있다. 특히 우리 일상에 내재한 폭력의 경험과 저항의지와 제도권 밖으로 누수되는 소외된 자의 비극적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교묘하게 위장되고 은폐된 폭력의 정황을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지점이 이 시집의 시적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시집에서 시인은 동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공권력의 폭력 역사와 공동체의 비극적 체험을 추적하고 있다. 관조의 기억을 통해 추적하는 폭력의 역사와 개인의 트라우마는 곧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목록이기도 하다. 때문에 동서양을 괸통하여 권력자. 종속되는 자의 길항이 긴장감을 형성하는 시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서안나 시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