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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꽃뿌리이끼-이아영 시집

김남권 2023. 12. 22. 07:35

별꽃뿌리이끼

이아영

나를 탁본해 보실래요

이끼는 이끼인데
별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꽃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뿌리같이 생긴 이끼일까요

나를 현미경으로 보실래요
꽃이라고 하면 꽃잎도 있고
꽃받침도 암술도 씨방도 다 있지요

다시 한번 관찰해보실래요
내 몸엔 달걀이 두 개 있어요
배와 등에 말이에요
이빨도 두 개 있다니까요
아무것도 씹을 순 없지만
뿌리, 뿌리는 아마도
못 찾으실거예요

소리 없이 웃고는 있어도
속 깊이 울고는 있어도
도대체 눈물을 모르는 내 모습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살다 보니 눈물샘이 다 말라버린
별꽃뿌리이끼 여기 있어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체중계

내 등에 올라설 때마다
다리가 떨리고 심장도 두근거리지
바늘이 자기 발바닥을 찌를 거야
될 수 있으면 바늘이 왼쪽으로 움직이게 하란 말이야
오늘도 친구 만나 피자 한 판 먹어 치웠잖아
커피에 시럽까지 넣어 마셨잖아
동네 앞산을 매일 다닌다고 해놓고
왜 내 말을 안 들어?
내 말 잘 들으면 S자 몸매에 옷맵시도 날 텐데
그것뿐이겠어?
편두통 만성 소화불량 잔병치레 사라질 텐데
좀 잘 봐달라는 말도 하지 마
날 매몰찬 사람이라 말하지 마
자기가 내 등 자주 오를수록 체중 관리 잘해줄게
어김없이 약속 잘 지킬게
건강 체크까지 해주는 스마트한 남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낮의 독백

빈집 나 홀로 창밖을 본다

뜨락 너머 저만치 단풍나무 한 그루

연기 한 점 없이 꽃불 피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루드베키아

두 눈을 감지 못 했는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지고 만

눈알이 검게 둥글어져 나온 그대여

당신 곁에 한 영혼이 있잖소

전설처럼 오래도록 살고지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아영 시인의 시편들은 포행하듯 세속을 거닌다. 거닐며 참회를 하고, 마음을 맑게 씻는다. 이아영 시인의 시 속 자연과 생명 존재는 환생한 그것이요. 정경과 현상과 행위는 관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다.
특히 소리 또한 관하는 대상으로서 수행적 차원에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는 포행하는 시이면서 흡사 벙근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얻게 되는 횐희심 자체이며 법의 향기 가득한 도량이다. 시인이 뜨락 너머 저만치 단풍나무 한 그루 연기 한 점 없이 꽃불 피운다라고 노래할 때 또 아카시아 꽃향기 무애춤 추면서 홍진 껴안고 라고 노래할 때는 불교적 통찰에서 태어난 시의 새롭고 쾌적한 진전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