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라도
임동윤
함박눈이 아파트에 내리고 있습니다
꽁지 짧은 새들이 와서 먼저 밟고 갔습니다
눈향나무 둘레가 바닥까지 휘어져 있습니다
쏟아지는 눈발이 야만의 뼈를 덮고 있습니다
물 쟁이는 나무들의 소리가 한창입니다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지우고 갑니다
오직 흰 것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안 보이는 것이 더 잘 보이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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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넓이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해 뜰 무렵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정오엔 짧아졌다가 저녁에 다시 길어지듯이
사람에게도 그림자는 자주 바뀝니다
해가 진 후, 그림자는 어둠에 사무쳐
어둠을 자신의 슬픔처럼 껴안습니다
서로 만나고 어떤 일과를 수행할 때도
나는 나만의 그림자를 만들곤 합니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만드는 그림자
그 품속에서 누군가는 쉬다 가지만
때론 어둠이 짙어 그늘을 안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와 그림자는 늘 한 몸입니다
보름달은 이슬 젖은 그림자를 만들지만
풀벌레 울음이 있어 그 넓이가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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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습성
가야 할 길은 직립이다
이 길을 오르기 위해선
수없이 교차를 건너야 한다
미로 같은 빌딩 숲을 지나야 한다
그래야만 코딱지 같은
집이라도 한 칸 마련할 수 있다
이곳에선 밤과 낮이 공존한다
싸리나무 울타리도
대숲 흔드는 바람 소리도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없는
그런데도 당신들은 꾸역꾸역 모여든다
직립의 길과 빌딩 사이에
아주 많은 먹잇감이 있다는 듯이
경적과 재빠른 몸놀림만 있는 곳
애기똥풀꽃도 민들레도 피지 않는다
직선과 고층과 에어컨과
안테나만 사는 곳, 이곳에서
길은 사람들을 품고 질주한다
씽씽 미친 듯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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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그림자 2
처마까지 폭설에 묻혀가고 있다
대낮인데도 빛살은
안방을 적시지 못하고
마당귀의 새들도
마루 밑으로 숨어든 지 오래
멀고 가까운 계곡과
산등성이에서는 나무들 휘어지는 소리
안방 귀퉁이에 머물던 빛살이
벽을 타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옛집은
눈보라에 싸여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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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무게
당신의 벤치에
황갈색 나뭇잎 얹힌다
고요가 더께로 쌓인다
작약이 피었다 사라진 그 역 앞
나비도 떠난 공원의 꽃술 언저리
꽃무릇 가득하던 적막한 숲길
참새 재잘대던 마당귀
모두 머물다 떠난 자리는
떠났다는 의미 하나로 고요하다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사라진 자리
어제 내린 햇살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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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일은 한 마디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단 한 마디의 단어를 찾기 위해 몇날 며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나는 시를 쉽게 쓰고 싶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쓰고 싶다. 수채화 그리듯 눈 감고도 그 정경과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다. 예를 들면, 고요라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나는 별과 바람과 숲을 동원한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가지 끝에 붙어 울음 우는 참매미를 동원한다.
이제 내 시가 얼마나 고요해지고 깊어질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다만 내가 사유하는 그 깊이 혹은 그 고요만큼 절정을 향해서 더욱 느리게 고요히 달려갈 것만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 아픔의 흔적들을 빛으로 승화시키는 나의 작업이 어떤 빛깔, 어떤 무늬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켜보고 보듬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지금 나에겐 소중할 뿐이다.
-시인의 에스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