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치 나그네
서봉교
주천농협 하나로마트에 전화벨이 울린다
"조합직원 양반 여그 사슬치*여"
"네"
"소주 항 개 하구"
"네"
"아니 궤짝으로"
"맥주도 항 개여"
"네"
"아니 궤짝으로"
"사홉들이는 시 개여"
"네"
"아니 궤짝으로"
"네"
"잠깐 지달려바, 여 할멈 뭐 시킬 거야
음 다시다, 맛소금, 밀가루, 겨란 한 판, 두유도 한 박스 갖다 조. 시방 올 거지"
배달을 갔더니 노인은 보이지 않고
안노인이 낫자루만 한 굵은 강아지 똥을 삽으로
치우면서
"이눔의 첨지가 뒈지지도 않고 술만 맨날 처먹어, 술짝은 들지도 못하는 주제에 쯧쯧"
아무 대꾸도 않고
술짝을 내려놓으니 안주인은 누런 신사임당을 내어주는데
처음 봤는데도 그 개는 나를 보더니
제 바깥 주인 모양 실실 웃는다
왜 웃지?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용석3리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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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낼모레 팔십을 바라보는 아부지
겨우내 입에 달고 사는 말
소 한 마리, 그놈의 송아지 한 마리 사자고
그깟 소 한 마리 살 수 있는 여윳돈이야 있지만
평생 한 고생
이젠 고만하시라고 미루다가도
25년 전 경운기 사 드릴때도
젊어 농사일로 골이 다 빠진 다음에야 사 드려서
후회한 생각을 하는데
막내가 아부지 전화로 대신 보내온 문자엔
소장수 마무개랑 낯선 계좌번호
아부지 성가실까 봐 멕이지 말자고 해도
일 년에 삼백은 버는데
촌에서 그런 돈벌이 어디있냐고
아부지 애원에 져드리면서
소장수에게 돈을 부치는데
마굿간에서는 여물 달라고
송아지가 먼저 우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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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를 심다
정월부터 이불 밑에서 촉을 틔워
애지중지하던 고추모 정식은
수십 년 해 먹던 논바닥을
내시 수술하듯 객토로 지목 정정한 살찐 밭이다
이부지 왈
모를 심으면
트랙타비 30만원
농약비 50만원
벼 베는 데 30만원
내 품값은 빼고
가을에 벼 서른 가마 수확하고 나면
개뿔도 아녀
일단 고추를 심어 봐
한근에 5천 원씩 3천근이면 1,500만원이야
논바닥에 마사토로 객토한 흙을
포경 수술하고 녹는 실밥 풀듯 만져보는데
고추모들이 꼿꼿하다
이 땡볕에
서야 할 때를 알고 서는 고추모는
얼마나 대견한 놈들인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든 작물이든
중요한 것이 고추여
그 고추를 어린이날 심는데
고추밭 뒤편
다래골의 화산바위가 엽초를 태우다 말고
부르지도 않은 증인을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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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화장실로 향하는데 울리는 마누라 전화
설날 보너스 받았다고 했더니
대뜸 다 보내란다
그게 뭔 소리냐고 했더니
그동안 먹이고 재워주고 빨래해준 게 어디냐고
밥 얻어먹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반문하기에
난
아무 말도 못하고 휴대폰만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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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물때를 벗는 이유
농촌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강물도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려면
길게는 열흘 짧게는 일주일간
물때를 벗는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리 지저분한 강물일지라도
물밑이 명경처럼 맑아지고
민물고기들도 물가로 마실을 가는 예의를 보인다
그렇게 그 시간이 지나고 강물 바닥이 누렇게 변하고 나서야
내년 이맘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한생을 살 준비를 하고
몸을 정갈하게 갖추고 난 후에야
철이 들었다 혹은 인생을 안다고
그때서야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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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교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생활에 밀착하는 정서의 결을 보여준다. 농촌에서의 일상이라는 시인의 소박한 생활에 대한 진솔한 언술은 시인의 삶을 떠받쳐 온 바탕 성정을 일체의 가식이나 장식 없는 맨 얼굴로 잘 드러나게 한다. 생활시의 진면목이라 해도 좋을 시인의 언어는 그래서 참 맑고 아름답다. 시인의 삶, 생활의 터전인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서의 일상은 시인 특유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자연 예찬이나 사회 비관적 참여시보다는 가족과 이웃에의 편애를 드러내는 좁고 깊은 관계성을 추구한다.
시적 수사를 배제하고 쇠락해져 사람이 귀해진 농촌에서의 생활, 삶과 가족, 이웃 같은 가까운 존재들에 한껏 열려 있는 시인의 애정 어린 시선과 소탈한 언어는 자연스러운 해학과 풍자로 어우러지며 구수한 냄새와 맛을 전해준다.
-엄원태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