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이서은
너는 결코 작지 않다
강물이 되지 못하면 어때
느리지만 치열한 원형의 발자국을 남기고
모든 직선의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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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
단골 국숫집에서 혼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내가 쩝쩝 소리를 내는 것도
아버지의 안부 전화가 잦아지는 일도
윗집 강아지가 밤새 짖어대는 것도
그게 다
외로워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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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 아침
나의 복숭아뼈는
더 이상 복숭앗빛이 아니다
청춘에 말린 햇살을 끌고 와
툭, 툭, 창문을 구워 먹는다
밤이 게을러도 되는 상강 무렵
복숭아의 살은 뜯어 먹고
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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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공작소
하루만큼의 고단함을 발끝에 싣고
빨래방 안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계절을 잊은 자기 덩치만 한 여행용 가방에서
숨겨둔 이야기를 뱉어내듯,
주섬주섬 속옷을 꺼내는 청년
빨래방 한켠, 가성비 좋은 커피만 즐기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가족들
타국생활 서러움을 씻어내듯
무심하게 세탁기 버튼을 누르는
눈이 크고 깊은 외국인 노동자들
발의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금성과 화성 어디쯤 건너오느라
얼룩진 먼지 조각을 빨래통에 넣은 이들은
내일도 희망으로 걸어갈 발자국을 찍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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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
가을 저녁 햇살이 미간을 지나
입꼬리에 다다랐다
바람이 움찔,
브이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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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발자국 공작소'는 장맛비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자발적으로 빗물 샤워를 선택한 사람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원한 빗줄기를 즐기며 온몸이 젖어드는 순간을 즐기고 있다. 카페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비 오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사색과 관념 사이를 여행하는 일이다.
스스로 빗속을 걸어 가는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비를 흠뻑 맞고. 감정이입이 되어 시의 씨앗을 파종하는 일이다.
첫 시집 잘 구워진 벽. 두 번째 시집 피노키오 기상청에 이은 발자국 공작소의 시들은 이전의 시편들과 다른 빛깔을 선보이고 있다. 장맛비가 내린다고 그 빗속을 피하기보다 맨몸으로라도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 빗물의 감정을 감지하려고 하는 간절한 숨결이 느껴진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 위의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발견하려는 눈빛이 시집 속에 오롯한 불빛이 되어 누군가의 길을 비추고 있다.
-김남권 시인 계간 P.S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