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직 도달하지 않은 입의 문장-조선의 시집

김남권 2023. 7. 28. 09:55

가을 쓸쓸함의 불치

조선의

달빛을 생각하다 낙엽을 밟고 말았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신의 의중을 벗어나
먼 곳의 소리까지 붉어지는 기도의 방식

뒷전으로 밀려났던 체념이 들썩거리며
그간 행불된 이파리들이 늦가을의 최전선으로 몰렸다

홀로라는 말에는, 쓸쓸함의 불치不治가 들어있었다

형형색색의 문장들은 온천지를 뒤흔든다

온갖 빛의 서직지 같은 도시에서 궁금증이 날아오면
왜 그토록 부질없는 일에 집착했는지
인정사정없이 현실에 떠밀리면서도
움켜쥐려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바스락대던 단풍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무슨 비밀을 해몽하는지 귓전이 분주하다

서로 다른 여독으로 인해 낙엽은 붉고 노랗고
생의 결절을 비감속에 숨긴다

머물 자리를 찾아 나뒹구는 것들은
새의 날개만 봐도 두근거릴 것이다

가진 것 다 내어놓고 떠나는 색의 빈자리

가산家産을 거덜 낸 낙엽이라고 쓰려다
아버지의 채무관계라 적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사람
-녹지 않는 생각


그리움의 끝을 만져보면
빛나거나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이 웅크리고 있다

수습할 수 없는 어제가 내일로 건너뛴 것이다

먼 곳에 정처를 둔 배후처럼
제때 녹지 않아서 생긴 오류

다리가 생략된 곳부터 하늘은 치솟는 벼랑이지

가장 아름답게 응결되는 하얀 피
한밤의 고요를 둥그렇게 굴려 눈길 속을 달려가면
나는 나에게 달려갈까

해 달 별, 그리고 구름의
보송보송한 자유까지
목젖에 달라붙은 비명, 그것은 세상의 통속

눈사람 그림자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동안
새로운 생명은 무너지는 순간의 빛

과거로부터 미래로 생살 돋을 때까지
불가능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거꾸로 읽어 내려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허물은, 얼마나 애틋한 기도인가


연민을 노래할 때만 열리는 목청

짝을 찾아 구애하는 목소리는 쥐어짜는 듯했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건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거꾸로 피가 쏠리는 세상이
비명의 7일간이라면 이처럼 기구한 생이 또 있을까

제풀에 포박되어
궁구窮究한 고뇌는 한참 깊었다

여분의 완력조차 소진되었을 때
밀어닥친 계절의 문턱에서 성채를 비우고 말았다

배곯는 소리 같은 그리움을
한곳으로 쏟아내기 위해 그토록 울었던 것
나는 울음의 내피 속에서 주춤거리기만 했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관통의 결사를 귓속에 욱여넣었다

허물은, 얼마나 애틋한 기도인가

몽환은 예시없이 밀려오는 것들의 블랙홀

최후의 울음이 회오리처럼 멈춰 선 그곳
말라붙은 주검의 허물 속에 극한의 적빈을 가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담쟁이


엉키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라 했던 말을,
헤매지 않아도 될 길을 헤매면서 되뇐다

한 타래 실을 풀어 허공을 칭칭 동여매도
자유만큼 고독하다거나
치사한 만큼 분개한다거나
그러면서 쓴웃음 짓는 세상

도적이라도 좋고 백성이라도 좋다
막장이니 절망이니 하는
그딴 것이 뭐 대수인가
살아내야 하는 숙명 앞에 낮은 포복을 한다

너무 두려워서 아득하기만 한 희망을 향해
엇박자에, 헛디뎌 고꾸라질지라도
서로의 발과 발을 포개고
환멸의 직벽을 넘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자목련을 읽다


죽은 듯 안으로 몰아쉬는 숨

맨 처음부터 꽃이었다면
곧추세운 붓자루는 무엇이며

입보다 먼저 꽃으로 떠나보내고
막다른 자세를 취해야 하는
삶의 난제는 또 무엇인가

낭만적이거나 객관적인 행적을 허공 속에 은폐하고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를 때
봄의 입구는 소타카토로 열릴 것이다

궁금증을 풀어내려는 촉감의 오독

그때마다 나는 끙끙 앓았다

그 높이에 꽃을 감추고, 붉은 고통을 뱉어낸다는 것은
소스라치듯 사무치는,
힘차게 낙화하는 몸부림이 아닌가

가지 끝마다 매달려 새가 되는 꿈

봄을 충전하려는 자목련의 밑동이 지축을 파고든다

겨우내 가슴에 처박아 둔 무수한 화살촉들
상처에 독이 오른 것처럼 자꾸 속을 후벼판다

기도는 눈물의 다음 몫

나는 아직 폐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봄을 읽는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선의 시인에게 시는 결국 아직 도달하지 않은 입의 문장으로 끊임없이 시도되는 발화의 문장이자 질문의 언어이고 때로는 침묵으로 무화해야 할 세상의 모든 언어를 욕망한다. 그것은 결코 도달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달하는(역설적인)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전해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