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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무당 거미-박재삼 문학상 수상작품집

김남권 2023. 7. 11. 16:28

구름의 행로

복효근

어제는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으므로
구름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구름은 흘러갔다

아침녘엔 어치가 와서 놀다 갔는데
오후엔 물까치가 왔다 갔다

다시 새를 기다리는데
가까운 선배 모친 부음이 왔다
잠시 후엔 거리조차 먼 선배 모친의 부음이 왔다

둘 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먼 쪽을 택해 조문을 갔다

빈소에 아는 조문객도 없고 해서
슬그머니 나와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아닌 쪽에서 부음이 오기도 하고
없는 쪽에서 구름이 오기도 한다

내가 가는 날
아주 먼 후배가 조문을 왔다가
가까운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갈지도 모를 일

내일은 박새가 몇 마리 놀러 올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예를 들어 무당 거미


무당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한 치 앞이 허공인데 뉘 운명을 내다보고 수리하겠습니까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것도 다가 아니고요

보이지 않는 것에 다들 걸려 넘어지는 걸 보면
분명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덕분에 먹고 삽니다

뉘 목숨줄을 끊어다가 겨우 내 밥줄을 이어갑니다
내가 잡아먹은 것들에 대한 조문의 방식으로 식단은 늘 전투식량처럼 간소합니다

용서를 해도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작두라도 탈까요

겨우 줄타기나 합니다
하루살이 한 마리에도 똥줄이 탑니다

무당이라니요
하긴 예수도 예수이고 싶었을까요

신당도 없이 바람 막아줄 집도 정당도 없이
말장난 같은 이름에 갇힌 풍찬노숙의 생

무당 맞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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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무신에 대한 소고


윗집 죽산댁 할머니가
댓돌 위에 눈부시게 닦아놓은 남자 흰 고무신 한 켤레

영감님 쓰러져 신발 한번 신어보지 못한 몇 년 동안도
가신 지 몇 년이 지난 오늘도
늘 그 자리

바람이 신어보는 신발
가끔 눈발이나 신어보는 그것에
무슨 먼지와 흙이 얼마나 묻었다고

마루를 내려서기도 힘든 노구를 움직여
없는 남편 신발을 닦아 당신 신발 곁에 놓으시네

저 신발 신고
꿈결에 오셨을라나
후생의 먼 길을 걷고나 계실라나

주인 없는 신발을 닦는,
신을 일 없는 신발을 놓아두는 저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바위를 깎아 석가탑을 세우는 일을 알 수 있으리

작은 쪽배 같은 신발 한 켤레로
이생과 후생이 이웃 같은 시간이 이렇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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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花葬


각시원추리 시든 꽃잎 사이에
호랑나비 한 마리 죽은 채 끼어 있다

시들어 가는 꽃의 중심에 닿기 위하여
나비는 최선을 다하여 죽어갔으리라

꽃잎에 앉아 죽어가는 나비를
꽃은 사력을 다하여 껴안았으리라

폼페이 화산재 속에서
껴안은 채 발견된 연인의 화석처럼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서로에게 소멸되고 있었다

다시
노란 조등 하나가 켜지고

어느 궁극에 닿았다는 것인지
문득 죽음 너머까지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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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傳燈


눈 덮인 덤불에
찔레가 붉은 등 몇 개
걸어놓은 뜻을

눈이 맑은 노랑턱멧새가
어찌 알고는
며칠 주린 제 뱃속에 모셔두기로 했던 거라

찔레 붉은 등이
제 등피의 도톰하고 따뜻한 불빛을
멧새에게 건네주면

이 아침 새는
화안하고 청량한 법문을
공기 중에 뿌려놓는다

멧새는 찔레 씨앗에 담긴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수십 수백 작은 등불을 땅에 심는다

그래, 꺼지지 않는 등이
그렇게 전해져 오는 거라
전해져 가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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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인은 박재삼 시인의 이러한 시적 방법론을창조적으로 계승한 시인이다. 즉 박재삼 시인이 이룩한 서정의 전통성을 법고창신의 자세로 내화시켜온 시인으로서 재래 문법에 안주한 고답적 서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창조적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 복효근 시인의 시편들은 쉬우면서도 세계와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 및 깊은 성찰과 생각이 계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재무 시인

복효근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친자연적이고 향토적 소재 형상화다. 박재삼 시의 특징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면 친 자연적 소재, 향토적 서정, 서러움과 눈물, 슬픔과 한, 구어적 진술과 어구의 반복일 것이다.
박재삼 시의 이런 특징을 복효근은 일부 섭취와 기피, 극복을 통해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공광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