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밥그릇 무겁다-엄의현 시집

김남권 2023. 6. 25. 08:36

봄 부추

엄의현

아직 아침 바람이 찬데
땅속에서 봄기운이 올라온다
텃밭 살구나무 아래
봄 부추가 고개를 든다
전라도에서는 솔
충청도에서는 졸
경상도에서는 정구지
강원도에서는 부추라 부른다
첫 잎 가장 연하고 향과 맛이 좋다
봄 부추는 사위도 안 준다는 옛말이 있듯
사람에 따라 향이 다르고
파아란 하늘처럼 시원한 맛이다
이슬 한 방울
부추 잎 위로 미끄럼을 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욕망의 크기


욕망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가난이라면
모든 어린이는 가난하다

이 작고 가난한 세계를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채워야
가난에서 벗어날까?

아이는 어른 없이도 잘 크지만
어른은 아이 없이는
더 크지를 못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음과 양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음陰과 양陽

아주 간단하게
옳음과 그름으로
바라보고

답을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다채로워 안타깝게도
간단하게 답을 구할 수 없구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복숭아 몇 알


아내가 어느 해 심었다

마당 텃밭 구석
대추나무 옆에 있는
나무에서 벌레 먹은
복숭아 몇 알이 달렸다
모든 과일이 그렇듯
사람 손이 가지 않으면
먹을 만한 열매로 자라지 않는다
그 복숭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동안
혼자 꽃을 피우고
혼자서 비와 천둥을 맞고
혼자서 햇볕을 견디고 키워낸 것이다

문득 부끄러워지는 석양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구와 밥을 먹는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나의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배경이기도 하다
그때 멋진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공동체는 색의 조화같은 것이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사라는 말이 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나의 아름다움은
나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아름다움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결정한다
지금 누구와 밥을 먹고 있는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엄의현 시인에게 시는 일상의 기록이다. 그에게 삶은 물 같다. 그에게 삶은 흐르고, 새롭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그는 유동하는 삶의 윤슬들에 마치 플라이 낚시하듯 시의 찌를 던진다. 그의 낚싯대에 걸려 올라오는 것은 개인사나 가정사만이 아니다.
그에게 삶이란 개인적인 층위와 사회적인 층위가 만나는 두물머리다. 그의 시에서 개인과 사회는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삶이라는 캔버스를 가로 지르는 씨실과 날실이다. 그의 시는 총체성의 재현을 향해 있고 이런 점에서 그는 리얼리스트다.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를 거부한다. 그의 시는 마치 무색, 무취의 물 같다. 노자의 말대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그의 정동은 물처럼 낮고 고요하며 맑다. 그는 겸허하고 담백하게 현실을 언어화 한다. 그의 시선은 낮은 곳을 향해 있고 그의 언어는 낮은 곳을 그리며 깨달음의 경지를 도달한다.
-오민석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