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평화
김완수
집을 나서기만 하면 험한 세상이었는지
대문 밖 골목에 난 잡풀과의 싸움은
소요를 진압해 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도로 아미타불 같은 질서 유지라 하지만
추석 무렵 반가운 혈육이 온다기에
진압용 무기를 들어 잡풀들 또 뽑았다
밤새 시푸른 모의謀議로 독기 질끈 품고서
무성한 힘만 믿고 연좌 시위 하는 것들
가을날 볕과 비 함께 울력해 온 거구나
어! 시위대 속에서 불쑥 꽃을 내밀며
골목의 평화주의 부르짖는 국화菊花하나
제초제 극약 처방은 멋쩍어 쏙 들어가고
강마른 호전성에 씨 붙는 국화의 말
평화를 행하는 게 어려운 일 아니구나
평화는 집 앞에서도 시작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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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눈
소의 굵은 눈망울엔 달덩이가 떠 있다
천 근 무게 눈물에도 기울지 않는 꿈이
흑옥을 갈고 닦은 듯 천공에 박혀 있다
한여름 노동판을 거방지게 걷는 게 꿈
하루살이 파흥에 눈이나 끔쩍할까
눈물샘 마를 때까지 소는 꿈만 일구는데
맷집 좋은 밤더위가 어깻등을 올라타면
선잠에서 깨나려 죽비 스스로 들고
매인 듯 날름 핥으며 외길 꿈 곱씹는 소
숨기척 순한 기운이 마당까지 훤한 건
쇠눈에 떠오른 달이 둥글기 때문이지
쇠눈엔 입적入寂한 고승의 눈부처가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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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마른논같이 드러난 촌로의 이맛살엔
뜬 눈으로 들여다본 고랑이 파여 있고
한평생 놓치지 않은 물길도 스며 있다
푸석한 하늘만큼 설컹거리는 현실
이마는 가물철같이 타든 때가 많지만
살붙이 달뜬 기별은 단비가 되기도 한다
단내 나는 하루하루 피땀이 쏙쏙 빠져
이마에 지층처럼 눌러앉은 시름의 켜
때때로 풍작의 꿈은 주름 불끈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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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 사월에게
땡볕보다 뜨거윘던 유월의 현장에서
군홧발처럼 쫓기다 안경을 깨뜨렸다
맨 처음 경계를 넘어 중심 됐던 열일곱
사월의 김주열도 그러했을 것이다
해맑던 열일곱도 함성에 울컥해져
목청껏 노래 부르며 중심을 가졌겠지
진실의 눈 한쪽에 매운 폭력 박혔을 때
푸른 주검 쳐들며 증언대에 선 바다
내 눈이 아릿한 것은 등 돌려 산 탓일까
은폐의 증거같이 또 불의 떠오른 날
유월이 잊힌 사월 일으켜 부축한다
열사烈士가 꿈꾼 세상에 징검돌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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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
함부로 쩍 벌리며 속살 보였다 해서
발라당 까졌다고 눈살 찌푸리지 마
인생을 먼저 산 것엔 눈이 질끈 갈길 거야
가을 햇볕 탓이라고 생각할 순 없잖아
무슨 일로 소리 없이 가슴을 열었는지
아리게 내비친 속내 가만히 보기만 해
뼛속들이 솔직해서 다 보여 준 것인데
핏빛 시린 눈물에 함께 젖게 되면서도
촘촘히 들어박힌 한 퉤 뱉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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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시인의 시조집 테레제를 위하여는 인간사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 세상에 나왔다.
한 해도 시조의 땅을 놀린 적 없이 성실하게 시의 밭을 일궈왔다는 시인의 말처럼 시조집에 실린 인간사의 면면들은 장대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다.
시조 편수가 많기도 하지만 시인이 보여주는 다양한 시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는 독자를 쉽게 시인의 세계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에도 문은 있는 법, 그곳을 찾아 들어가면 어느덧 시인의 시편들이 현대시조의 주제 의식을 확장하며, 시조로써 세상 이해의 지평을 열어 준다는 것을 알게 한다.
-최재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