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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손택수 시집

김남권 2023. 6. 19. 08:50

귀의 가난

손택수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
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저녁 숲의 눈동자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 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연못의 연인


못을 깜박이느라고 숲이 설렌다

속눈썹 떨구듯 떨어지는 잎들이 쌓이고 쌓여 못물을 깊은 동자의 고요 속에 있게 한다

낙엽이 지는가 바람도 없는데 가지와 가지를 건너뛰는 청설모 기척이라도 있는가

쉬지를 않고 일어나는 눈짓은 고요야말로 파문의 주인임을 알게 한다

소금쟁이 발바닥에 간질밥 먹이듯 비가 오는 군,하고 옆을 보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렇게 뚱, 한 표정이라면

세상에는 연못에만 오는 비가 있다 연못만 알아듣는 빗소리가 있다

외롭고 간지러운 비밀들이 으밀으밀 새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보잘것 없는 수심에도 깎아지른 천애의 아득함이 깃드는 못

한 방울의 수심이 품은 하늘에 이르기 위하여

숲에 눈을 두고 산다 나무들이 대신

감았다 뜨는 눈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부산釜山


산과 산 사이에 수평선을 걸어놓았다
솥에 바닷물을 퍼 담아 소금을 굽고 있는 것이다

범일동 부둣가 문현동 지게골을 떠돌았다는 이중섭의 흰소인가 한다 수평선만한 거구와 파도치는 근육들이 들어가 끓고 있는 흰빛, 피골이 상접해서 깨끗이 타오른 뒤 타일 바닥 딛고 뚜두둑 뿔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여름이면 아비의 이마에 맺혀 서걱이며 돌아오던 저녁 별도 있다 골다공 숭숭 바다를 품던 골판지 집

짜다짜다
몸이 염전이었으니
짜고 짜, 한번 더 쥐어짜 끓는
은지화의 바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숨은 꽃


꽃이 없을 때 나무의 이름을 알 수가 없다면
나무를 보지 못한 거다

늘 꽃일 수는 없으니까
열매도 보고 수피도 찬찬히 뜯어보는 거지
같은 초록도 색조가 바뀌어가는 걸
따라가보는 거지

꽃말을 지워보렴 차라리
라일락의 우정과 코스모스의 순정과
영산홍의 첫사랑을 놓아주니
뜻밖에, 홀가분해진 건 나

이름에 가려져 있던 이목구비가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찾지 못한 꽃이 잎 사이의 잎새가 아니겠는지,
저 의미심장을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로
머리카락을 내민 채 숨는 숨바꼭질이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손택수는 2018년 7월 1일자로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이 됐다. 감정의 물결이 절제를 잃지 않으면서 굽이치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지금 읽어도 놀라운 시다. 눈물의 왕이라는 노작의 표현은, 비록 이 시가 백조 동인풍의 비탄에 젖어 있기는 하나, 세속 권력의 제국 변방에서 감정의 자치령을 통치하는 왕의 존재 가능성을 설득하는 당당한 울림도 가졌다.
그 왕이 바로 시인, 이라고 하면 낡은 낭만주의의 잔재로 돌리겠지만 그런 발상을 낡지 않은 방식으로 계승할 시인으로 손택수가 있다고 하면 꽤 그럴듯하다.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