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
조극래
한 송이 장미꽃이 문병 왔다
해쓱한 얼굴에 얽은 몸, 물병으로 목발을 했다
함께 왔던 친구가 내 엄살을 퉁퉁 불리고 갔다
창밖에는 만성체증이 도진 붉은병꽃나무 소낙비로
열 손가락을 딴다
바람의 간섭에 넌더리를 내는 뻐드랑니 창문
창가는 서름서름한 마음들이 모여드는 공원 같은 곳
나는 꽃의 낯빛을 살피다가
문득, 밥과 국물을 나눠주던 휠체어 백장미를 생각한다
점심을 받아 든 노숙자들은
때늦은 사월의 눈을 말아 들이키고
공원은 잠시나마 살이 올랐었다
지금 나는, 발목에 붕대를 감은 것만으로도
비바람이 들이치는데
그녀는 깎아지른 슬픔으로 얼마나 뒤척였을까
이 꽃 또한 뿌리를 잃었을 때
여린 잎마저 가시를 움켜쥐었을 것이다
혹독한 질시를 다 걷어내고
숭고한 꽃으로 다시 피기까지, 그 몹쓸 몸살이
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보인다
병실 안으로 더치는 빗소리에 속말까지 젖은 나를 보고
꽃이 함빡 웃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당신이 쏟아부은 폭설을 치우느라 혓바늘이 돋는다
그럴 수 있다
당신은 현재에 열중하고 나는 내일마저 탕진했으니
폭설을 벗겨 내도 겨울이다
당신이 짜낸 눈물 두 접시가 녹지 않는다
따뜻한 변명으로도 소용이 없던
왜 겨울 장미는 무덤 자리를 화병으로 선택했을까
쉽게 감정에 노출되는 혼잣말처럼
우리는 말문을 닫아걸고
각자의 신발로 현관문을 밀었지 호기롭게
누구에게나 버리지 못하는 산책이 있다
당신이 절여 둔 향기가 뒤꿈치를 밟는 것 같아
뒤돌아 보면
바람이 몸살을 하는 것인지
나도 몰래 앓는 소리가 새는 것인지
시골 우체통이 전갈하는 자욱눈
오지 않는 기별은 걸음을 풀썩 주저앉히고
천변을 수런거리는 산다화 꽃잎
오늘은 빈둥거림이 수북하고
혼자 남겨진 고독이 비명을 지른다
중얼거림이 당신 흉내를 낸다
시든 장미를 버리려다 손가시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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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에 들러 골목을 사다
구멍가게만 보면 왜 비가 내릴까
어쩌다가
어머니 눈길은
저물녘 빗소리 되어
구멍가게로 흘러들었을까
발이 젖는다
천식을 앓는 듯한 너는
느티나무 아래 좌판을 펼쳐놓고
조붓한 골목과
늙은 애비 술주정과
어미 근심을 팔고 있다
아직도 골목을 껴입는 고립이 있습니까
그늘로 짠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이 가끔 들린다오
네가 펼쳐놓은 좌판은
어린 내가 어른으로 흘러가기 위해 파먹던 숟가락질
오래 삼킨 눈물이 우연한 인사치레가 된
이제는 껴입기도 힘든 골목 한 벌 사서 나오면
비가 자라던 어머니 눈동자 속으로
꽈리꽃주머니를 눌러 쓴 아버지
허정허정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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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의 산책
꿉꿉한 여름을 벗느라
달팽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누군가의 화병 아가리에 살점을 떼어주고
제 이마를 찢는
천변 수국,
먹구름을 잔뜩 빨아먹은 개울이 배앓이를 한다
들풀거미 줄에 걸려 넘어진 수풀떠들썩팔랑나비가
빗물을 쏟아서
이른 저녁의 아랫도리가 다 젖는다
꽃물 홀짝이던 박각시나방이
수국 잎새마다 물방울 집을 짓는다
건너편 자드락밭 서리태가 한 덩이 어둠을 싸질러 놓고
무안한 듯 멀어진다
가로등 불빛이 어둠으로 내몰린 저녁의 등을 토닥여준다
살갗에 소름이 돋은 바람이 고양이 울음을 입에 물고 골목을 돈다
혼자라서
네가 삐대던 방이 조금 울었던 것 같다
환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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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부르면 빗소리가 쏟아지고
오늘 밤은 빗소리가 쏟아져 꿈이 다 젖는다
노루잠이 슬어놓은
뒤척임이란 벌레들
버글거리며
나를 좀 먹는다
빗소리를 자르러 꿈 밖으로 발을 디디면
불친절한 밤이 파놓은
수북한 어둠 구덩이
네게 속말이 닿지 못하도록
목울대를 키우는 빗소리
어쩔 수 없어
젖은 꿈의 눈꺼풀을 덮어주며 다독거린다
노루잠의 어깨를 주물러 본 적 없는 나는
아무래도 밉보인 모양이다
빗소리는 한 번도 메마른 내 입술에
젖을 물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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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래 시인의 시의 서정은 울음을 곧 모든 존재에 대한 감수력으로 확장한다. 그에 기대어 한 존재가 겪어온 고통과 겪어갈 고통을 심려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시에서 공간적 배치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그도 한때는 서랍을 에서 사물들, 서랍, 그리고 익명의 그를 연상하는 공간적 전개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추억의 사물들이 담긴 서랍의 주인이고, 그 추억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느슨한 공간적 배치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모든 존재가 슬픔의 유비로 묶는 서정적 시선이다.
-박동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