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들
-Corona Blues
한창옥
정체 모를 작은 벌레가 하늘과 땅 사이 목덜미를 잡고 있다
입 코를 가린 침묵 속의 호흡은 뜨겁다
새들도 여린 꽃도 목젖이 보이도록 떠들고 싶겠지
사소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아무도 듣지 않는 외침이 엉긴다
애초에 잘 익은 고집의 수위는 내려올 줄 모르고
이미 던져진 주사위는 대답 없는 물컹한 맨발이다
지하철 경로석은 오랫동안 몸을 비우고
부드럽게 포옹하고 있는 연인의 작은 어깨가
정갈한 가을비에 처연히 젖고 있다
계단도 숨이 차도록 달음박질치는
땀이 흥건해진 택배기사의 호흡소리
닫힌 대문과 당신 사이에 따뜻한 기척을 놓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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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젖꼭지
구멍 난 아버지 러닝구는
어머니 여름나기 티셔츠였다
구멍 숭숭 뚫린 누런 속옷 한 벌도 귀한 시절
하얗게 삶아 입는 최상의 옷맵시
늘어진 러닝구를 뚫은
맨살의 조롱박 같은 젖가슴은
사랑이란 깃발을 꽂은 보물섬이었다
여인들의 수다가 통하는 동네 빨래터가 아닌
속옷매장 구석에서 귀엣말로 쑤근거리는
옹알이 같은 브래지어
젖 먹던 시절의 이야기로 봉긋한
젖무덤을 가리는 나는 아직도 스무 살 새악시
어머니가 남긴 러닝구 구멍 틈새로
내 어린 날은
핏줄 선 엄마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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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방향
싸락눈의 작은 알맹이들이
민낯 세상을 비수처럼 내리치고 있다
맥박 없는 오후는 형식 없이 얼어가고
막힘 없이 뻗어나갈 어린 배우가 어쩌다 길을 잃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저녁 뉴스에서 영하로 던졌다
지상의 혹독한 인심은 다른 날개가 되어
돌아갈 수 없는 울음으로 꺾이고
페르소나는 가면을 쓰고 자유롭게 유영한다
길을 잃고 숨이 막히게 꽁꽁 얼어붙은 아우성은
꿈꾸던 세상을 원망하며
허공에 고드름이 되어 컥컥인다
싸락눈은 낯선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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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윽 베이다
손에서 빗나간 사기그릇이 쨍그랑 조각났다
한 조각씩 주워 모으는 손가락을
쓰윽 베이고 만다
소중히 여겼던 것이
나도 모르게 나를 향한 칼날이 되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끼리 마주 보며 슬퍼진다
손때 타도록 아끼던
차갑게 조각난 그릇을 다정하게 쳐다본다
이미 깨어진 것,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다
저마다 다른 해석에 따라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니
후회할 여유조차 없다
베인 손가락을 쳐다보는 칼날은
조각조각 고개를 들고 하얗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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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누가 이렇게 꽃을 피어놓았을까,
엑스레이로 본 가슴팍에 잔득 핀 이상한 꽃무늬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독방 1348호실로 격리된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이 사실을
절대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혼잣말을 한다
고백도 못한 꽃잎에 소독제를 뿌리겠다고
주사액 입자는 점점 끈적끈적하게 바뀐다
충실한 꽃잎은 끊임없이 거부와 항복을 반복한다
주사바늘이 이리저리 헤집어놓은 멍든 중독
봄기운이 마법처럼 눌러주고 있다
커튼 열린 정오의 사이로 흘러내리는
벚꽃들의 몸짓, 몸짓ᆢᆢ 아, 꽃멀미
예고 없이 찾아 온 몹쓸 징후는 버티기에 아프다
수위 높은 긴긴 잠은 감성 없는 병실에서
숨소리 부드럽게 흩날리고
지상으로 차곡차곡 덮이는 벚꽃들의 절대호흡,
아무 일 없듯 1348호에 폭죽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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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옥 시인은 어지러운 시간의 여울 속에서도 마음의 천진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어린이처럼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인간사의 곡절을 구김 없이 맑은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더 나아가 천진성이 사라진 시대에 맑은 세계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실천한다.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신생의 창조를 할 수 있는 의지를 내면에 새긴다. 이 창조의 동력과 인식은 폭발적이다. 낭만주의자는 늘 미래를 꿈꾼다. 낭만주의자에게는 봄꽃이 시고 인간에게는 언어로 된 시가 있다.
생명이 위태로울 때 시를 품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의 아픔과 시련을 만났을 때 진정한 시가 탄생한다. 한창옥 시인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맑고 깨끗한 상태에서 과거의 사연을 반추하고 현재의 국면을 조명했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낭만주의 세계관으로 변화를 꿈꾸고 해피앤드를 소망했다. 그가 이룩한 희망의 지평은 코로나 시대의 암울함을 걷어낼 만하다. 그것은 인간의 나른함 잠을 깨우는 봄의 전령이다. 이 희망찬 봄소식에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하고 온 힘을 기울여 신생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숭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