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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질-김나비 시집

김남권 2023. 4. 3. 10:55

물방울 키우는 여자

김나비

손가락 사이, 물방울 모양 물집이 올라왔다
투명한 돔을 만지자
부푼 막 속으로 팔이 들어가고
어깨가 들어가고 몸이 쑥 딸려 들어간다
안온한 태막이 나를 감싼다

고요가 출렁이는 양수 속
반투명한 옆구리에 설핏 비치는 늑골,
붉은 얼굴에 까마중 같은 눈을 달고
거꾸로 매달려 둥글게 손가락을 빨면
탯줄 타고 스며오는 당신 목소리
봄볕 되어 두런두런 등을 쓸어 준다

언제부터인가 손가락 사이엔 당신의 뿌리가 자라고
있다
몸에 혈류처럼 흐르는 당신을 닮은 피부
짜내면 짜낼수록 멍울로 번져가는 야윈 뒷모습
잘라낼 수 없는 인연의 포자가 곳곳에 발아한다

혼자 견뎌야 하는 밤을 남겨두고
내 생의 바깥으로 등불을 들고 떠난 당신
별들이 외로운 운항을 하는 날이면
내게로 와 밤새 푸르게 뒤척이는,

폐각 같은 손톱으로 물방울을 누르고 또 누른다

툭 터지는 물집 사이로 울컥 쏟아지는 나
검은 창에 비치는 얼굴에 손가락을 뻗어 더듬는다
내 얼굴 위로 겹치는 박꽃 같은 얼굴

그리움으로 피는 야윈 밤
물방울 자라는 소리가 푸르게 손가락을 건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파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파르가 내게 왔다는 것을

아장거리며 웃던 아이가
환절기처럼 떠나간 새벽
나는 안개에 휩싸인 마을 끝에 있었고
전깃줄에 들깨처럼 앉아 있는 까마귀 울음 들으며
길이 없어질 때까지 걸었다
그때 처음 다가온 것이 파르였다

어디서부터 불어온 걸까

서걱이는 갈대밭에 홀로 서성였거나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였거나
얼음 위에 맨발로 서 있었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
그저 나와 함께하는, 그 소름 돋는 따듯함을 파르라
불렀다

파르는 수시로 내게 기척을 내민다
나를 데워주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주르르 흘러내릴 때
드릴이 몸을 떨며 늑골을 후비거나
사시미 칼이 조각조각 생각을 도려낼수도

누군가 내 심장을 훔쳐 갔을 때
파르의 어깨에 기대
숨 쉬어지지 않는 가슴을
푸른 멍울이 감기도록 두들겼다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파르:조어로 화자의 감각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나비질


팥을 쥐면, 차르르 차르르 파도 소리 들린다

흰 수건 머리에 두르고
바다색 방수포 위에 쪼그려 앉은 당신
빛바랜 스웨터에 헤진 몸빼가 바람을 등지고 있다

누렇게 마른 더미를 두들기면
구부러진 등을 따라 촘촘히 박히는 햇살
굽어 비틀린 손가락으로 잔가지와 꼬투리 걷어내고
검불에 뒤범벅된 알갱이를 쓸어 키에 담는다

하늘 향해 키를 올렸다 내리면
차르르 차르르 착차르르
파도 소리 내며 날갯짓하는 팥알들
당신의 붉은 바다가 키 안에서 출렁인다

키내림을 하먼서
불어올 겨울을 홀로 준비했을 당신
헐렁한 옷 속을 파고드는 맵찬 갈바람 견디며
팥알처럼 단단히 여물어 갈 아이들 날개를 키웠으리
거친 해일처럼 불어오는 설움을
바람에 쭉정이 까부르듯 날렸으리

차르르 차르르 착차르르 티껍지가 날아가고
팥이 키 안쪽으로 튼실하게 쌓이면
눈물 같은 알갱이 그러모아
함지에 차곡차곡 담던 당신

마당 한 켠 바람이 불 때마다
아득한 물결 되어 명치에 쌓이던 소리, 소리들

팥 쥔 손을 펴면, 웅크리고 앉은 키질 소리가 차르르
펼쳐지고
어머니의 굵은 주름이 햇살에 풀어진다

차르르 차르르 착 차르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환상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김나비 시인의 시적 문법에서 생소한 것이 아니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환상을 이용해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러한 판타지가 활용되고 있는데, 저 독일의 문호 괴테가 파으스트 박사의 전설을 토대로 썼다는 파으스트의 서사가 패러디되고 있다.
신학, 철학, 법학, 의학 등 여러 학문을 통하여 우주의 지배원리를 깨닫지만, 백발의 노인이 된 후, 이러한 학문들의 부질없음에 회의를 느끼고 목숨을 끊으려 하는 파우스트, 그리고 앞에 나타난 악마 메피스토의 제안에 의해서 젊음을 얻기 위해 영혼을 판다는 서사가 전도되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상실과 부재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면서도 신산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자양분으로 기능하는 역설적 기제인 과거의 아름다운 것들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시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적 제재임에 틀림없다.
-황치복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