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
한영희
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집에 들어와
어름*으로 거미의 혼을 빼놓고 있는데
길고양이 밥자리를 놓고
숨박꼭질 놀이를 시작한다
스무 날쯤 굶어 기어갈 힘조차 없는 거미와
바람을 노래하는 어름꾼이 하나가 되는 시간
날개옷을 입어도 먹이로 결정되는
줄타기의 법칙
냄새를 버리는 사람들
허기를 먹는 고양이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보며
포식자라는 이름이 달리는 것인데
가슴 뛰는 숨소리는 탄력을 묘사하고
물이 빠져나간 껍질을 바람의 등에 실어 보낸다
치워진 밥그릇은
어디에 숨겨놓아야 하나
*남사당놀이의 줄타기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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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내력
발을 담그고 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긴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다
바닥을 허옇게 드러낸 여자의 맨살 위로 버들강아지들이 살망 살망 내려앉았다
몸이 불어나던 날 다급한 손길들이 밤새 수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속내를 뒤집어놓고 바닥에 가라앉았던 찌꺼기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밤에도 잠들지 않는 귀는 늙은 백로의 오래된 은유처럼 찰랑거렸다
치어들이 수심 깊은 곳에서 그녀의 젖을 빨고
폭설의 날에는 은쟁반 위에 백설기를 올려놓고
돈 벌러 간 남편을 구백아흔일곱 날 기다리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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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묘지 울타리를 가르는 찔레나무들
언제부터 그 아래 살았는지 모른다
어젯밤
어깨를 들썩이던 여자가 축축함을 내려놓고 간 후
의자는 전염병에 걸린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어둠이 걷히기 전에
아기 눈빛 같은 이슬을 모아 세수를 마쳐야 한다
환경미화원의 빗자루는 나의 넓은 품을 달래줄 것이다
햇살로 아침밥을 지어 먹고
뭉친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을 덜어내기 시작하면
나는 만삭의 배가 불러온다
겉옷의 색이 점점 야위어간다
더운 바람은 계절도 없이 불어오지만
체온은 비석 아래 쌓여가는 먼지를 닮았다
허물어져 가는 몸에서 꽃을 피우고
나비가 내려와 노란 꽃가루를 털고 간다
목련꽃 봉오리 피워 물었던 가지에서
내부수리 중 푯말이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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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
간판들이 불을 끄는 골목길 어귀
환하게 웃고 있는 단팥빵
집으로 데려온 몸에서
젊은 아버지 냄새가 난다
아버지는 샛별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지문 없는 손가락으로
영산포구에서 가져온 비린내 스며든 단팥빵 하나
어린 딸 머리맡에 놓아두고
딱딱해진 몸을 온돌방에 녹이셨다
솜이불 속에 숨겨놓은 단팥빵에서
아버지의 땀내와 비린내가 새어 나오면
나는 초승달처럼 눈을 뜨고 핥아먹기 시작했다
무거운 아버지의 체온을 빨아먹던
나만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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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 대한 기억
수유를 마치면 키 작은 돌담에 등을 내려놓았다
텃밭에 자란 오이로 목을 축이고
돌담에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
대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와 다투던 밤
달빛에 기댄 채 그림자로 울던
꽃무늬 손수건을 좋아했던 젊은 그녀
주름이 깊어질수록 뒤뜰과 멀어지고
등이 떠난 돌담에는 이끼가 혼자 놀고 있다
뒤뜰과 엄마는 돌아오는 계절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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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희 시인의 시는 시상과 문장 사이에 뒤틀림이 없다. 이는 언어가 현상을 끄덕이거나 삼투되는 동안의 기다림을 시인이 한 발 물러나 견디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상시의 그가 보여주는 직선적이고 도전적인 삶의 자세와 배치되지만, 반면에 그를 아는 이들이 풀이라서 다행이다를 읽으며 느낄 깊이와 새로움을 상상하게 된다. 크고 작은 아픔들이 그의 시에서 모이고 뒤섞여 마침내 시집의 전면이 된다. 이런 연민을 한영희의 어투로 말하면 '가끔은 사상범처럼 붉어진다'는 고백이 될까
-임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