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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조금 초록 벽지-장선희 시집

김남권 2025. 11. 21. 07:44

에게 식당

장선희

  구운 새우를 먹으며 너는 페타치즈를 자른다 실내엔 아그네스 발차의 '우체부'가 흐르고 너는 조용하고 짧게 '에게'라 말한다 나는 뭐, 뭐라고? 하며 쟁반에 담긴 에메랄드 해변을 찍어 먹는다 너는 거친 빵을 손으로 찢으며 '치유'라 말한다 나는 '빵이 맛있다'로 알아듣고 말랑한 햇살 한입 베어문다 우린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 여행객과 섞여 삼지창을 찾는 중이다 세상 언어가 해산물처럼 각양각색이다 헤라클레스가 작은 섬마을 통구이 기계 위에서 이발소 간판처럼 돌고 있다 하얀 골목은 화산재가 피운 꽃, 이곳은 지중해식으로 문어를 굽는다 내가 크라켄을 봤다고 하자 식탁 위 페룰라 꽃을 너는 '불'이라고 한다 시지프스가 밀어 올린 돌이 굴러내려 섬이 된 그쯤의 수평선 너머 하얀 신전을 오늘의 마지막 후식으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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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이어야 한다

당신은 앉아 있다 마루에, 흔들의자에, 벽난로 쪽 창가 먼 하늘로 앉아 있다

당신을 확인하다 작은 멍들이 생겼다

그늘 드리운 나무로, 들녘으로, 뜨거운 바위로 끝까지 앉아 봤나요

조약돌에 쌓인 수많은 물결로, 난파당한 작은 배의 마지막 해안가를 끌어당겨 누군가의 눈물로 앉아 봤나요

조문 다녀온 옷을 털고 신발을 턴 모습으로, 하얀 국화 같은 발자국 하나로 앉아 봤나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시냇물 소리로 앉아 있었다고

식탁으로, 조용한 여름 숲속 바람으로, 개울가 새 한 마리 머리에 인 수련으로 앉아 있었다고

며칠 동안만 봄이었다고

언제 오냐고 한번 묻지도 않고 먼 산 진달래로 그냥 앉아만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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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서점

책 속에 기찻길이 있는지
책을 뽑으면 몸이 덜컹거렸다
비자 없이도 갈 수 있는 나라
에델바이스에 맺힌 물방울을 마시고
시몬느 드 보봐르의 옆모습을 닮아갈 때
맞은편 탁자가 덜컹거리며 멈춘다
커피 냄새를 읽는 건
책장에 꽂힌 포우의 검은 고양이
올리브 향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밤의 층계에 선원의 항해일지를 올려놓는다
선장은 없고 도서 목록만 출렁이는
일곱 평 공간 안에 들어와 있는 뱃고동
히야신스 꽃잎 같은 눈을 이고
진눈깨비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면
책은 은하철도행 티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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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조금 초록 벽지

벽지로 막아놓은 세상입니다
벽을 통과하면 하얀 꽃잎이 휘날립니다

웅성거림을 찾아 아이가 벽속으로 들어가고
사람으로 매만진 저녁이 반질거립니다

아무도 아이를 찾지 못하네요
아이는 벽 밖으로 나오려다 넘어집니다

초록 벽지는 또 한 번 담장일까요
초록과 같이 자란 하얀 벽이
안을 밖으로 바꿉니다

반쯤 빠져나온,
벽지에서 바라본 옆모습이 들꽃 같습니다

이름을 불러보지만
입술 밖으로 떨어지는 건 빨간 꽃잎이네요

초록 벽지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숨바꼭질이 너무 재밌던 나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느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벽지가 바래도록 자란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사방연속무늬로 뻗어나간 들꽃입니다
천장과 벽 사이 어디엔가 있는 세상

찢어진 벽지를 꽃잎인 양 날려 봅니다
벽을 넘을 땐,
숟가락 한두 개쯤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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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희의 시는 잠 속에서 회복되는 그러한 이미지의 긍정성을 우리에게 시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 풍요를 향해 우리를 열고, 이미지의 빛이 견인해 오는 이미지를 느끼면 족하다. 그러다가 우리 스스로도 이 빛나는 이미지들로 몸을 바꾸어낼지도 모를 일이다. 장선희가 보낸 시적 초대장에는 그 가능성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김학중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