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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문지아 시집

김남권 2025. 11. 19. 08:59

당신의 울음을 필사하는 하얀 밤

문지아

당신의 이목구비가 비로소 서사를 갖기 시작했다

특이점 없는 무혐의 속 오늘의 날씨에서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너는
가만히 가만히 나를 계산하고 있었음이라
발화되기도 전 표정들과 함께 다 잠겨버린 소식들의 혀를
더 이상 구해내지 않음으로써 이해를 포기하며
각자 구기다 놓아버린 무용이 종이컵들처럼
사연은 점점 멀어져 간다

오직 한 사람의 표정으로만 성큼거리던 저녁
소용이 다 되어 떨어져 나가는 포스트잇처럼
이제 '세월'에서의 오늘이 곧 떨어져 나갈 뿐

당신의 울음을 옮겨 적는 밤
열정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그런
내 눈에 이미 가득 차오르는 것이 계절임을 모르고
자꾸만 자꾸만 봄으로 뒷걸음질 치는 나는

드믄드믄

있다

건너갈 수 없는 하나의 몸을 오래오래 쫓는다

아무런 기억도 기억해 내지 않은 채

그저 전속력으로

지나쳐야만 했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닻

아무리 기다려도
무너진 뼈대로 자꾸만 헛돌며 다가오는
바람
머물렀던 것들이 깊은 흉터를 남기며
통증을 전해오지만
눈사람의 체온처럼 차갑기만 했지
편의점 테이블 위
잔뜩 구겨 버려진 종이컵들의 양상으로
가장 바닥에 있어야만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닻처럼
끝까지 전력을 다해 가라앉아서
비로소 떠오르는
아픔도 있다
영혼이 없는 눈동자는 자꾸 지워져 가지
어둠 속에서 당신의 시선은
이미 소진되었고 말이야
낯선 사람의 이름만 살고 있는
당신의 입술만이 반짝거린다
입술을 무수히 떠다니던 문장들의 무덤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순장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수몰지구

누운 네가 떠올랐다

동명이인 한두 명은 집계되었을 텐데
베개는 어떻게 알아 보고
무리를 빠져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가져다주었을까

아침마다 이마를 짚으며 빗겨주었기에
그의 머릿결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희미한 환영의 옹알이가 들렸다

날을 지새우면
오늘과 오늘만 이어지는 수몰지구

아이가 걸어간다
모르는 애들과 뒤섞여 소꿉놀이 한다
그네를 타다 엄마 목을 조른다, 나는
푹신한 벽 같은 베개를 끌어안는다

한통속처럼 묶은 사제가
닳아빠진 구원을 외는 소리

잠긴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자
지상은 통째로 복원된 카타콤 같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의 성별

급히 올라탄 기차,
역방향 좌석에 앉아
졸고 있는 세계를 스쳐보니
서로 다른 성별의 빗방울들이
창문에 엉겨 붙어 흐르고 있어

창가 쪽,
그 손이 살며시 떨리더니
언제 깨어났는지
내 손 위에 겹쳐
아프지 않게 눌러오는 그의 온기

우리는 시작점으로 돌아가기에 너무 멀었으니
더 눈을 감으라며 속삭이는
어딘가 낯설고도 익숙한 루틴
잠에 빠져드는 동안 갤럭시 터널을 개통했다

내 꿈의 경전 속에서
작은 생명이 성모에게 청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종착역이 다시 출발점이 되는 세계가 있다면
새로운 이야기같이 고쳐질 수 있을까?
물속에서만 울 수 있는 물고기처럼
이 세계는 꼼짝없이 네모난 동그라민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울음을 옮겨적는 시인의 통각은 따뜻한 맥박으로 가슴에 스며든다. 문지아의 실존적 자아는 고통과 기쁨의 크레바스에서 열정적으로 솟아오른다. 시인에게는 상처가 쓰는 동력이며 그런 슬픔의 세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문지아의 시는 물집이 심장이 되기도 하며, 떠도는 빙하에서도 맥박을 듣는 귀를 가진다. 문지아의 변신과 파동의 감각은 태동을 찾는 모성의 마음처럼 오래 남아 깃든다.
-이재훈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