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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입술을 다 써버렸습니다-김현주 시집

김남권 2025. 11. 3. 09:11

목련빌라

김현주

꽃피는 동안만 풍경이 되는 동네,
지상에 세 들어 살다 보면 도장 찍을 일이 참 많습니다
쪽, 쪽, 쪽, 오늘은 쪽수가 많군요
이쪽저쪽으로 날아다니는 것은 벌들의 오랜 습성이라,
연분홍 새 전단지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춘화春畵 같은 골목은 한창 성업 중입니다

한 잎 지고 나면 다시 한 잎이 돋는 목련의 직거래,
이 봄을 담보로 너의 새 입술을 대출받을 수 있을까
마지막 불꽃이 튀듯 쪽, 쪽, 쪽,
만화방창에 걸려든 벌 떼들이 진땀을 흘리며 고쳐 쓰는
불온한 문서, 양쪽에 서명날인만 잘 하면
이 봄도 무사할 것 같습니다만 날인하지 않는다 하여
꽃피는 일을 주저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노리개를 반쪽으로 갈라 증표로 쓰듯이
영혼까지 끌어 1,139개*의 깡통에 불도장을 찍듯
아으, 궁창에 가득한 왕들
깜박 졸다 펴본 뜨겁던 혀들의 저 감각적 일치
몸으로 간음한 저들의 죄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지만,
입으로 간인間印한 저들의 죄는 다시 용서할 수 있지만
도홧빛 혀 사이에 끼어 까맣게 죽어버린 벌새처럼

반지하 창틀에 끼어
울고 있는 봄비,
첫 쪽을 넘겼을 뿐인데 붉은 입술을 다 써버렸습니다

*빌라 왕 한 사람이 소유한 주택의 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야, 한술 뜨고 가라

해밀턴호텔 골목 상가 문설주마다
어린양의 가파른 울음이 아직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는, 폴리스라인 안쪽으로
어느 슬픔이 진설해 놓은 막막한 젯밥

아야, 그만 놀고 손 씻고 들어와 밥 먹어야지!

촘촘한 인과를 밀치고 헤엄쳐 가던 노을이
슬쩍 하늘의 전광판을 지워버렸다

응답하기엔 너무 투명해져 버린 아야, 의 이름들

목자는 어디가고 양들만 흩어지고 흩어져서
어느 들짐승의 밥이 되었는가,

비탄의 놀이터, 지상의 울부짖음을 밟지 않으리
젖은 달빛 사이로
흐르고 흘러가는 아이들

이제 우리 모두 가면을 벗고,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다 저녁 때, 둥근 밥상에 동네 꼬마들을 둘러앉힌

우리 엄마는, 글 그랬다,

아야, 때가 늦었으니, 찬은 없어도 밥이나 한술 뜨고 가거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끼

두근거리는 창문이었어요
흥건히 젖어 드는 머리칼
어디선가 퀴퀴한 물의 냄새를 맡고
물갈퀴를 인질로 삼고 있는
은둔의 서식지,
울음소리가 차단된
우리들의 방은 너무 깊고 멀었어요
범람한 계단들이 무명의 발로 뛰어내리나 봐요
온 동네 둥둥 떠다니는 설치류조차
하수구로 난입해 유령의 흉내를 내나 봐요
잠긴 벽을 물어뜯어서라도 살아내려는
하등식물, 끊임없이 찍찍거리는 그 소리가 궁금해
이웃은 가끔씩 손을 넣어 울음의 뿌리를 더듬어 보지만
음지에 기생하는 것들은 끊을 수 없는 중독 같아요
누구의 고통도 혼자 독점할 수는 없다, 샘솟는 뉴스는
배경으로 밑 빠진 독에 장마를 부르지만
땅 밑에 밑줄 긋던 땅강아지는 언제 멸종된 거죠
접혀 있던 계단엔 종기가 누렇게 퍼져 진득거리는 진창길
'출입금지'라는 붉은 포스터도 아랑곳 없이
흥건히 젖은 세 모녀가 한 상 가득 녹슨 이끼를 떠먹는 시간
젖은 벨벳 같은 슬픔은 생각보다 겁이 정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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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결심

당도가 사라진 관계는 위험하다

싱싱한 햇살 소품으로 앉혀둔 창문 밖의 온도들
잔설이 드문드문 남은 마음 밭은 춥고 어둡고

계곡에 방사한 곰을 기다리는 불량한 신부
성한 것 아껴두고 상한 것, 무른 것, 먼저 골라 먹다가
반은 썩고 반은 물렁해지는

네모 상자 속의
둥근 발작,

굳이 서로 몸을 섞지 않았는데도
시큼한 살의 냄새, 그대들은
식어가는 중인가, 끓어오르는 중인가

개인회생불능 진술서 같은 긴긴밤에
하얀 재로 풀썩 주저앚은
등신等神,

이쯤에서 돌아앉아 백설탕 부어 귤 청이라도 만들어야지

청귤 밭 너럭바위에 쪼그려 앉아
체온을 낮추는 겨울 볕뉘는 결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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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시적 실천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내면화하며 존재의 균열과 무너짐을 붓끝으로 봉합하는 고요한 증명이다. 시인은 남김없이 자신을 소진하여 언어의 힘을 통해 현실의 폭력과 불의를 드러내고, 안부와 기록이라는 인간적 행위를 진정한 치유와 공감의 시작으로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자, 시인의 윤리적 소명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기는 명징한 결론이다.
-염선옥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