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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빨간 신호등을 보고있다-김고니 시집

김남권 2025. 8. 8. 08:47

메밀꽃 필 무렵의 고백

김고니

너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
메밀꽃, 그 작은 꽃잎 위에

당나귀가 지나간 길에
꽃잎은 너의 얼굴로 피어있다

달빛이 내리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얀 꽃잎이라고 했나

첫사랑처럼 피어난 꽃은
마주 보고 있어도 그리운 햇살이었다

바람의 얼굴로 꽃을 안을 때
나는 들었다, 들판 가득 울리는 꽃잎의 고백을

메밀꽃 필 무렵이었나,
너를 사랑했다
꽃으로 피어난 하늘의 이름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이처럼

아이처럼 다시 말을 배웠으면 좋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예뻐
구슬처럼 동그란 말들을 뱉어내고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 웃는
그런 보드라운 입술로 돌아가면 좋겠다

처음부터 걸음마를 다시 배웠으면 좋겠다
물웅덩이 앞에서도 더러워질까 망설이지 않고
살짝 얼어버린 길을 걸을 때도 겁내지 않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알고 있는
해맑은 작은 발이 되면 좋겠다

처음부터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는
그저 해맑은 빈손으로 다시 살고 싶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어둠이 너에게 닿으려 할 때

네가 혼자 걸었던 길을 뒤돌아봤을 때
어둠보다 먼저 켜지는 가로등이 되고 싶다
빗방울이 너에게 내리려 할 때
빗물보다 먼저 달려가 햇살이 되고 싶다

네가 혼자 울던 날들이
구름이 되어 너를 따라다닐 때
더 가까이 너에게 다가가
내가 먼저 울어주는 우산이 되고 싶다

슬픔이 너에게 닿으려 할 때
네가 술을 마시며 빗물처럼 울 때
내 안의 모든 슬픔을 불꽃처럼 태우고
너를 위해 달려가 햇살로 울어주고 싶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녀는 빨간 신호등을 보고 있다

멈추고 싶지 않았지만 브레이크를 밟고 선다

똑같은 모습으로 길 위에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차 안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어떤 사람은 거울 속 풍경이 되어버린 얼굴을 보고 있다

그녀는 빨간 신호등을 보고 있다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긴 시간이지만
어쩌면 촛불이 꺼지는 만큼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하얀 연기가 선을 그으며
허공을 휘젓고 떠나는 동안의 시간인지도

브레이크를 밟고 있는 발끝이 슬퍼졌다

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은 잠깐이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영원보다 오래일지도 모른다
우주를 떠나는 동안의 긴 시간이지만
푸른 불빛의 화살표를 따라 찍는 마침표일지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간은 가끔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기억은 또한 시간을 지배하거나 역류시키기도 한다. 김고니 시인이 문단에 나온지 십 년이 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시를 쓰고 동시를 쓰면서 아이들에게 동시와 글쓰기와 논술을 지도하는 전업작가로 치열한 삶을 버텨내고 있다.
십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시와 동시는 자연과 서정, 삶과 인연의 승화로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편들마다 서정적 화두가 시의 메시지를 선명한 깨달음으로 이어주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며 사랑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인연의 고리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인으로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