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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잎사이 나를 숨기다-안연옥 시집

김남권 2025. 1. 20. 08:47

푸른 꽃잎 사이 나를 숨기다

안연옥

마음 약한 일들
다 봄에 있었다

연약한 것들 다 봄에 모아놓고
영원할 것 같이 화사하더니
이내 파란을 엎질러 놓았다

나긋나긋하던 말투들
다 질겨졌다

봄을 따라왔는데
어느새 빗줄기에 갇혔다

내 꿈은 제비꽃이나
연분홍 홑잎에 숨는 일이었다
숨어서 때론 쌀쌀해지자는 것이었는데
결국엔 뒤끝들을 앓게 되었다

지나간 꽃들,
다 봄에 있는데
우린 그 어느 봄으로도
들어가지 못한다

봄은 언제나 기다림 끝에서
달아날 듯 들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기억의 집

엄마를 뒤적이면
낡은 옛집에 이른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엄마는 자꾸
집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다고 하지만
사실, 옛집이 엄마를 기다린다는 것을
엄마만 모르고 있다
엄마와 나는 가끔 그런 옛집을 뒤져
이것저것을 나누곤 한다
마당에서도 곧잘 보이던
별자리들은 내가 갖고
새색시 시절, 엄마의 시집살이를
위로하던 뒤란은 엄마가 갖고
어느 장마철 마당을 기어 들어오던
징그럽던 두께는 엄마에게 주고
대신 투명하게 자라던 고드름은
내가 갖겠다고 억지를 쓰곤 했다
나 시집올 때 예쁜 그릇들을
싸고 싶었던 모란꽃잎은
엄마 몰래 내가 감추고
꽃무늬 수놓아진 횟대보는
엄마에게 준다

기억 속의 옛집은 단란하다
그러나 기억 속을 걸어 나오면서부터
가족은 그 수가 줄어들고
늙고 병들어간다
점점 낯선 얼굴이 되어가는
기억의 집
그 집 가족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비를 앓는 남편

비가 내린다
선풍기 틀어놓고 잠든
남편 몸에도 비가 내린다
봄비든 여름비든 모든 비는
땅을 욱신거리게 한다
텅 빈 땅에서 초록을 돋게 하고
잔잔한 물결 넘실대게 한다
그래서 남편은 자면서도
끙끙 비를 앓는다
쑥쑥 자라던 남편의 꿈
모질게 꺾어놓은 그 자리에서
초록의 새순이 돋는다
바짓단 걷어 올린 발목으로 푸른 물줄기가
더 푸르게 돋고 어느 청춘의 한 때를
달리는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돋는다
빗줄기는 무릎과 허리를 지나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날린다
아직도 남편의 몸에는
엉킨 빗줄기가 많아서 흐린 날에는
그것들, 꿈틀거린다
그 사이 고구마 순이 자라고
고추밭으로 매운 맛이 모여든다
비 내리는 날은 남편의 휴일이지만
뿌리들이 살찌고
줄기들이 바다를 늘인다
낮잠에서 깬 남편의 몸에서
비가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