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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밤으로 갈까-김휼 시집

김남권 2024. 6. 30. 13:30

식물의 시간

김 휼

여섯 살 심장 위에 올려진
검은 돌

식물로 분류된 이후
아이는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다

힘껏 내달린 시간이 멈출 때, 그 길 끝에서 안개는 피어올랐다

여섯 살의 손과 스물세 살의 얼굴,
한 몸으로 죽은 듯이 누워 귀를 키웠다

출구 없는 침묵

희번덕 눈을 뒤집어 고요를 좇는 아이를 놓칠세라 어미는 잎사귀 같은 손을 붙잡고 시들어 간다

병실 창밖의 구름을 이불로 삼고 잠든 오후

어미의 눈물이
식물을 키우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퇴행성 슬픔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오를 즈음 말문이 트였죠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았어요 덕분에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던 어느 날 번쩍, 하늘을 가르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 게 버릇이 되어 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 데 오백 년이라는 치명적무게를 가진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 은닉하기 좋은 새의 울음을 걸어 두고 몽상에 듭니다

오늘은 청명, 누군가 시름 깊은 방에 들어 푸른 잎사귀 몇 장 머리맡에 두고 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속으로 쌓이는 회한은 나이테를 감고 도는데 움켜쥐면 구체적이 되는 슬픔, 나는 지금 옹색한 옹이를 창 삼아 세상과 단절을 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신앙이 되는 것은 타당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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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기분, 살아지는 기분

지는 해를 보고 싶어 차를 달렸다
색들이 한 방향으로 고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출구로 돌아가는
입체적인 엔딩은 꽃들의 무덤 같았다
아니 불을 먹고 영생을 갖게 된 불새의 기염이었다

문득, 불편한 속을 들여다보던 어느 한 날이 떠올랐다
무표정의 의사가 링거 줄에 무언가를 투여하자
나를 두고
아득히 내가 사라지는 기분
누군가 흔들어 깨워 겨우 나에게 돌아오던

노을을 오래 바라본다
마음 첩첩 흐르는 붉은 핏물은
사라지기 좋은 성분을 가졌을까

출구를 찾고 있는 이 있거든
노을 앞에 서 보라

나를 두고 사라지다, 살아지는 야릇한 이 기분
저 노을을 능가할 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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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밤으로 갈까

이 골목의 밤은 미완의 사랑 같다

어슬렁거리는 그리움과 내일을 맞대 보는 청춘들의 객기, 접시만 한 꽃을 피워 들고 저녁을 달래는 담장, 그 아래 코를 박은 강아지의 지린내까지

어둠에 물드는 것들을 간섭하느라
거북목이 되는 중이지만 난 괜찮다

홀로 선 사람은 다정을 기둥으로 대신하는 법이라서 담보 없는 빈 방과 함석집 고양이의 울음까지 시시콜콜 알려 주는 이 골목의 살가움이 좋다

붙박이로 있다 보니 사고가 경직될까 봐
나도 가끔 어둠에 잠겨 사유에 들곤 한다

진리는 항상 굽은 곳에 있다
비탈을  살아내는 이 기울기는 너의 밤으로 가기 좋은 각도

퇴행을 앓는 발목에 녹물이 들겠지만
굽어살피는 신의 자세를 유지한다

깊숙이 떠나간 너를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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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휼 시인의 시집 '너의 밤으로 갈까'에 실린 상당량의 시는 묵직한 슬픔을 서사화하고 있다. 특히 시집을 여는 시인 '식물의 시간'이 그러하다. 이 시는 여섯 살에 병상에 누워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 식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와 병실 창밖의 구름을 이불로 삼고 출구 없는 침묵을 보듬으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대뇌의 이상으로 인해 의식이나 운동성은 없으나, 호흡과 순환은 유지되는 상태인 식물인간은 식물처럼 살아는 있으나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한, 다시 말해 의식이 사실상 없는 상태를 광범위하게 지시하는 용어이다. ㅡ 중략 ㅡ
무너질 것만 같은 존재의 곁에 머물며 마음을 애쓰는 일은 쉽지 않다. 김휼 시인이 시집 '너의 밤으로 갈까'의 여러 시편에서 재현한 바로 이런 사유에 기대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김휼 시인의 시는 구두점 없는 앓음을 지속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