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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령
꽃, 메시지 그리고 너
소낙비가 내리는 창문이 그리워져서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왔다 가는 것이 보이지만
문을 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삭제)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너
먼 곳에 사는 너
한잔할래 허공에 잔 부딪치는 소리
들려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환하게 웃으며
내놓았던 꽃다발
(삭제)
하현달처럼 기울어가는 너
꽂잎 시들다가 떨어지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도 한자리
술잔을 채우는 것은
찌르레기 울음소리로 남고
(삭제)
기억 속에 있는 너
술잔 속에 비친 나를 건져 올려 보아도
잊지 못하겠지 너를
(삭제)
지워도 지워도 다시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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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女子의 집
女子는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한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얼굴로
엉덩이를 맡긴 의자가
푹, 꺼져가는 줄도 모르고
검은 바퀴벌레 날개가
하늘을 가리는 줄도 모르고
그 옛날
박하사탕이 담긴
누런 종이봉투 같은 얼굴로
나만 보면
죽은 사람 같은 얼굴로 묻는다
묻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처럼 묻고
또 묻는다
집이 무덤 같지?
점점 굽어져 가는 등허리가 무덤처럼
변해가는 女子
날마다 무덤에서
사는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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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녀를 열지 않는다
문도 벽이 된 지 오래다 벽에는 흐린 하늘과 얕은 연못과 새끼 물고기가 있고 지금은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벽에 걸린 액자 속에는 죽은 남편과 젊은 그녀와 어린 자식들이 살고 있다
그녀에겐 18평 아파트가 세계의 전부다 시든 군자란 꽃을 보며 늙었다고 중얼거리다가 말라죽은 관음죽 잎사귀를 잡아 뜯고 있다
식탁 밑으로 알약이 굴러간다 몸을 구부리다 화를 낸다 날마다 기다리는 초인종을 울리지 않는다 벽을 열면 또 다른 벽이 문이 되어 기다린다 벽은 열리지 않는다
살바도르 달리의 시계가 그녀 곁에 누워 있다 시계는 닫혀 있다 그녀는 닫혀 있다 아무도 그녀를 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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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만 끝내 만질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사랑이란 어쩌면 시인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은/안아줄 몸이 없는 사람"을 바라보며 "노을에 누운 사람은 아름답다"(시인의 말)는 고백은 서이령의 시적 복무가 가시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이령 시인의 시적 육박은 내면화된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루 속에서 물줄기 기다리는 콩나물/목구멍에 배어드는 푸른 핏줄/검은 보자기 뒤집어쓴 채/혓바닥으로 핥는 욕망"(오늘의 기도)과 같은 육탄의 묘사는 비극적 세계 속에서 생명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머리는 잘려나갔는데도/생각의 뿌리는 계속 자란다."(오늘의 기도)는 진술은 시인으로서 자의식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가 없는데도 자라나는 생각의 뿌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크로테스크한 장면이야말로 서이령 시인이 도달한 시적 현장이 아니겠는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리든/우리는 바뀔 것이다."(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는 고뇌에 찬 결의는 그의 시를 더 먼곳으로 이끌 것이다. -우대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