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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는 왜 밤에 눈을 뜰까-이영숙 시집

김남권 2025. 6. 26. 08:52

지금은 나를 채록할 시간이다

이영숙

  무작정 걷다 보면 알게 된다 그토록 그리워한 사람이 나였다는 것을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해 외로웠고 내가 나를 위로하지 못해 고독했던 길 무심히 넘겨버린 것들이 내 삶의 옆구리였다는 것을 해 뜰 녘의 동살과 해 질 녘의 석양이 또 하나이듯 지금 걷는 이 낯선 길이 살아온 길과 맞닿은 반사된 길이라는 것을 북쪽을 향해 돌아가는 쇠기러기 철새의 날갯짓을 본 후에야 내 삶의 저편 주름진 시간을 읽는다

  바싹 마른 갈댓잎 어깨를 툭 치고 길가의 모난 돌덩이 길 막으며 그동안 안팎 없는 삶이 어땠느냐 애쓴 날들을 물으면 그때는 습하게 쌓아 올린 인생의 공든 탑들 내려놓고 정오의 빛으로만 내 몸의 대륰을 횡단할 것이다

  돌이 말 걸어 올 때까지 걷다 보면 낯익은 단내가 그림자처럼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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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는 왜 밤에 눈을 뜰까

고요에 갇힌 깊은 밤
스르륵 눈을 뜨는 부엉이
빛의 소멸 속에 깨어나
바닥에 웅크린 채 어둠 속에서만 숨을 쉰다

사내의 칼날과
빛과 소음으로 가득 찬 대낮의 이야기
그곳에서 밀려난 여인들의 흔적은
별빛 아래 은밀한 그림자로 기운다

부엉이는 묻는다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누구의 눈물이 흐르는가
밤의 고요 속에서만 피어나는
그 침묵의 목소리들이 큰 눈으로 껌벅거린다

칭기스칸이 달리던 초원이 낮이라면
흉노로 끌려간 왕소군의 변방은 밤이다
낮의 세계가 못 본 온전한 세계에서
부엉이는 밤을 안고 눈으로 말한다

내 시선은 밤의 것
지워진 이름과 침묵한 목소리들
수많은 몸을 읽느라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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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몸

물알이었을 거야
애초 시간은 흐르지 않아 비어 있는
볼 수도 없고 담기지도 않는 알몸
삶을 버려야 볼 수 있는 시간 밖의 흰 몸
비어 있어서 큰 것이라면 바람을 닮았겠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에 지문을 남기고 가는

몸은 안과 밖이 되고 뒤집어도 그대로고
어쩌면 우린 아주 오래전 살이 없었는지도 몰라
너는 나이고 나는 너였는지도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몸이 되었지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이름으로 점점 분명하게
각자 지닌 그릇들 깨트려 볼까 다 깨지고 나면
우리 다시 만나게 될까
그때는 우리에게 시원이나 소멸 따윈 없어
시간은 우리를 묶어 두지 못하니까
기억도 예견도 없는 곳 오직
'지금'만 있을 뿐

다시 너에게로 가는 길은
흰 몸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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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우리는 흩어졌다가 모인다
별이 무너져 먼지가 되고
먼지는 흘러 땅이 되고
땅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숨이 된다

공룡의 뼈가 깎여 돌이 되고
그 돌을 깬 손이 집을 짓고
그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시 별을 바라본다

지렁이가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으로 풀이 자라고
그 풀을 염소가 뜯어먹으면
나는 다시 염소의 눈 속에서 빛난다

바다는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가 되고
비는 강이 되어 흐르고
강은 사람의 피가 되어 뛴다

우리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움직이고, 흔들리고, 섞일 뿐
모든 것은 하나의 몸
우리는 우주가 키워가는 긴 꿈의 생명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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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손길과 소유의 욕망이 어떻게 본래의 존재를 방해하는지 시 작업을 통해 다시 한번 점검한 시간이다. 지구상에 즐비한 존재들, 우리도 그 안에서 중첩되고 얽힌 채 살아가는 존재자들이다.
이번 시집 "부엉이는 왜 밤에 눈을 뜰까" 그 자체로 있는 것들의 드러남을 통해 있음이 지닌 신비와 경이를 발견하고 화해의 손을 내민 작업이다.
칼 세이건은 문학은 인간이 만든 가장 강력한 마법이라고 했다. 좋은 문장 하나가 세계를 통채로 바꿀 수도 있는 연유이다. 또한 글쓰기는 흐르는 강물도 같아서 끊임없이 흐르면서 나와 타자가 속한 세계와 자연을 읽고 유기체로 엮는 길이다.
그 여정의 기본은 내가 누구인지 탐구하는 길로부터 시작이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면서 상대나 세계 내 존재를 안다고 할 순 없다. 내가 나를 만나 나로 온전히 사는 그날이 온다면 시장에 나가 큰 해먹 하나를 살 것이다.
-시인의 산문 중에서

이영숙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은 그동안 독서 에세이와 평론집을 발간하면서 사유와 공감의 철학을 발견해온 그의 의식과 감정을 녹여낸 기억의 에스프레소와 같다.
부엉이가 밤에 눈 뜨는 이유는 눈부신 대낮의 화려하고 다양한 사물들의 유혹보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고요하고 침착하게 때를 기다리며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대낮의 독수리가 되기 보다는 한밤중 어둠 속을 침묵으로 응시하며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녹여내며 결정적인 순간, 딱 한번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