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간 사람들이 남긴 미소-표현시 동인
폭포
최수진
물이 그득하오
눈에 들면 눈물
코에 들면 콧물이니
어딜 가나 물, 아니 든 곳 없소
저런, 그릇을 떠난 물은 곧 없어지니
어서 빨리 득음에 이른 자의 가슴에 넣어주오
그이의 단추를 잘 채워 간직하도록 하란 말이오
허나 마음에 든 건 진물일 것이매
그 역시 흘러야만 할 테요
쏟아지는 물줄기로 모처럼 귀를 뚫었소만
구멍마다 차오르는 물은 부족한 때 없으니
보시오, 이 모습은 꼭 폭포 같다오
그렇게 넘쳐야만 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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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주륵주륵 내리던 비가
우리가 집에 갈 때 딱 그치니까
참 좋다, 그치!
어제 숙제 깜빡하고 못 했는데
오늘 선생님도 깜빡하고 검사 안 하셔서
참 좋다, 그치!
'그치'하고 말할 때는
행운을 만난 것 같은
기분 좋음이 밀려와
'그치'하고 말할 때는
그 행운을 너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야
너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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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에서
임동윤
그의 집은 언제나 땅 밑에 있다
햇살 한 자락 보이지 않는 매표소에서
그는 종일 행선지를 판다
좁은 항구로 던져지는 신용카드와 현금들
그때마다 그는 자동판매기처럼
재빠르게 표를 뽑아 갈 길을 알려준다
매일 자동차 경주하듯 뛰어가는 사람들
사각의 작은 행선지 한 장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주거가 허락되는 곳은
오직 열 평 남짓한 캄캄한 감옥일 뿐
간혹,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박스를 깔고
신문지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죽음보다 깊이 잠든 것을 보면
그래도 아직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공전하는 자신의 삶을 대견해한다
마지막 전동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바쁜 귀가의 발걸음으로
계단을 통해 부산하게 빠져나가면
그제야 한껏 기지개를 켜는 사내
비로소 감옥에서 벗어나
그의 별이 빛나는 지상을 향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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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이화주
멍석 위
고추 뒤집던 엄마
팽나무 그늘 속으로 후다닥
고추들은
땡볕 좋아 좋아
불볕 샤워 좋아 좋아 좋아
고추 불덩이
한겨울에도 식지 않아
가루가 되어서도 식지 않아
김치 먹다
불, 불난다
입안에 불 끄게 물 물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