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붉은 절규-이자규 시집

김남권 2025. 3. 6. 08:39

빌딩숲 아래 Pantomime

이자규

한 굴뚝이 연기를 물고 나타나자 한 굴뚝은 연기를 뿜고 나타났다 한 굴뚝이 빨고 오고 또 연기를 흔들고 왔다

굴뚝 수만큼 하늘과 구름들이 소문과 염문을 에워싸고 기류와 기류끼리 죽이기와 살리기가 시작되는 고요전쟁의

파랑새를 잡은 굴뚝이 재채기하고 긴 발톱을 씹은 굴뚝이 침을 닦았고 빛나는 날개를 먹은 굴뚝이 벼슬을 찾고 있었다

한 굴뚝이 손을 털고 벤치에 앉고 한 굴뚝이 Cuffs Button을 채우고 앉았다 서 있는 이들을 달래며 타르와 니코틴이 연기를 몰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세상의
먼지가 먼지를 짓뭉개고 꽁초가 꽁초의 살 껍질을 벗겨냈다 그들의 속살이 진동하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물의 현상학

유리잔에 맹물 반쯤 채우고 미지의 바다로 향해 볼까요?
급속도로 녹아내리는 세상 물의 신을 몰라요
너와 나를 침전시킨 도랑물의 투명한 맛마저 쾌적해서 말이죠
포칼로스와 함께하는 기분입니다

반가운 해갈의 이면을 분석해 보았죠
당신의 온도상승과 나의 수원 고갈을 방정식해 보면
라니냐 엘리뇨가 무슨 상관?
강물 밑바닥에 쌓인 우리의 걸레 탓입니다

병든 아기를 어쩌나요?
탄소발자국과 물의 발자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어요
해서 물의 날에 외쳤다는군요
'21세기의 전쟁은 깨끗한 물 쟁탈전이 될 것이다'
리우회담에서 시작되었다는군요
물 없이는 사나흘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
대체할 물길이 지구상에 없다는 거죠

유리잔에 맹물 반쯤 채우고 옹달샘을 응시해 보는 추억
옛 초가집 뒤란 대숲 그늘쯤이면 쾌락의 은밀한 루터랍니다
송사리 둘 투합한다면
병든 북태평양 한복판에서도 유빙流氷을 받아들였다는
물의 신을 말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붉은 절규

핏대 세우고 달리는 차
속임수 하늘 창에 부딪힌
새의
희망심장이 차창에 터졌다

새들은 새일 뿐
공해항로를 모른다

빈 종이컵만 나뒹구는 길가
핀 제리세이지 핏방울 꽃
꽃이 아니다
노래를 잃고 비상을 잃고
울음 나부끼는 날갯죽지 위로
먼지바람이 흩어가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01년 <시안>으로 등단한 시인 이자규의 새 시집 <붉은 절규>는 그의 오랜 시력에서 비쳐 나오는 현실인식과 비판의식과 생명의식이 어우러져 빚어낸 시적 융합의 결실이다. 다수의 작품이 기후 위기의 사회 문제를 언어의 청진기로 진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붉은 절규는 이 시대의 작가들이 공유해야 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킨다. 시적 자아의 광학 렌즈로 유기체적 시스템의 붕괴현상을 정밀하게 재생하는 극사실주의 성향이 나타난다는 점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송용구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