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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한강 소설

김남권 2025. 2. 26. 08:52

  오래 전 일이다.

  계약하기 전에 한 번 더 그 방을 보러 갔다.
원래 흰색이었을 그 방의 철문은 시간과 함께 색이 바래 있었다. 더러웠고, 여러 군데 페인트가 벗겨졌고,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녹이 슬었다. 그게 전부였다면 그저 유난히 낡고 지저분한 문이었다고 기억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301'이라는 그 방의 호수가 씌어진 방식이었다.
  누군가가-아마 그동안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그 문의 표면을 긁어 숫자를 기입해놓았다. 획순을 따라 나는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세 뼘 크기의 커다랗고 각진 3, 그보다 작지만 여러 번 겹쳐 굵게 그어 3보다 눈에 먼저 들어 오는 0,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온힘을 다해 길게 그어 놓은 1,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 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얻으려 하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다.
-본문 13~14쪽 '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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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욧했다고
하지만 며칠이 지나 다시 목록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단어들을 들여다 보는 일엔? 활로 첼로를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 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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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흰'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모여 흰 것들에 대한 사유와 깨달음의 화두를 던지는 모노드라마다. 혼잣말을 하듯 펼쳐 나가는 짧은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의 감정선으로 이어지고 독자는 어느새 그 짧은 문장들 속에 깊이 침잠하게 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한강의 '흰'을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흰 것들이 주는 내면의 의미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 검은 사슴,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의 문체는 시가 바탕이 된 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