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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듣는 와인춤-강성남 시집

김남권 2025. 2. 25. 09:48

나비

강성남

엄마는 나를 꼭꼭 접어 봄 속으로 내보냈다

괴어놓은 돌이 자주 흔들리는 정릉동 산허리, 새 교실 맨 앞자리엔 고향에 두고온 책상이 따라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광화문 앞에서 내리면 종로소방서가 보일 거야 청진약국을 끼고 한옥 담장을 따라가 서울 지리에 깜깜한 나는 아담한 '아담'이라는 요정을 용케 찾았다 커다란 나무 대문 안에 연못, 수면에서 반짝이던 물비늘이 일제히 나를 비추었다 마루엔 속저고리만 걸친 여자들이 화투를 치고 세상의 꽃들은 모두 모여 피고 있었다 주인 마담은 내 이름을 안다고, 빳빳한 지폐 한 장을 쥐여주었다 진홍색 모란처럼 온몸이 물들어 나오는 내 귀엔 드르륵 장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열세 살 분홍 원피스엔 자꾸만 꽃가루가 달라붙었다

봄이 그려준 약도 한 장 들고, 봄 속의 봄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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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뜰


꽃잎은 물의 눈꺼풀이에요

수면을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려요

버드나무는 분홍 원피스를 입었어요

꽃잎들이 수면을 한꺼풀씩 벗길 때마다 잔잔한 파문이 일어요

엄마가 악어 등을 타고 놀아요

건들바람이 타일러요, 물을 안고 가라고요

엄마가 꽃나무 속으로 예배를 보러 가요

호숫가를 걷는 사람들 유모차 끄는 소리가 들려요

봄이 화들짝! 눈을 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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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듣는 와인춤


오른손 검지는 가장 깊은 음역의 시다

그가 그녀 '파' 건반을 지그시 누른다

잠들었던 바다가 천천히 눈을 뜬다

바닷속엔 그가 연주하다 만 그녀 음색들이 산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물의 건반들이 하나씩 일어선다

한 옥타브 두 옥타브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한다

그가 그녀 내면 깊숙이 숨을 불어넣는다

잃어버린 말들이 발꿈치를 들고 스텝을 밟는다

무수한 밀어들이 숨어 있던 기억들을 조율한다

심해에 잠들었던 물고기들이 군무를 춘다

갇혔던 말들이 파! 숨비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솟구친다

내 손엔 수만 개의 금맥이 산다

우리는 서로의 손끝에서 우주를 왕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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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2018년 제2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강성남 시인의 첫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은 특이하게도 와인을 책 제목에 넣고 각 부를 와인의 종류/특징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와인춤이라는 생소한 시어의 연상과 상상, 그리고 그 춤을 추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 듣는 행위를 통해 다소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해녀의 숨비소리를 이미지화한 표제시 "당신과 듣는 와인춤"에서 와인춤은 가장 깊은 음역의 시를 쓰는 행위이면서 그가 그녀의 '파' 건반을 지그시 누르자 물속과 수면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