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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요일의 죽비-이아영 시집

김남권 2024. 3. 27. 05:31

은방울꽃

이아영

초대 받아 먼 길 떠난 조붓한 샛길

누구를 기다리다

해마다 그 자리에 꽃등 내거나

오롱조롱 방울소리 들릴 듯 말 듯

은자골 막걸리 그윽한 맛에 취해

노을빛으로 흔들리네

저무는 성주봉 산기슭

꺼지지 않는 혼불이 되어

천년 어둠 밝힌 꽃등 저리 환하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소, 길들이기

흰 벽을 마주하고 가부좌를 튼다
눈은 반쯤 뜨고
내 무릎을 칠 번개를 찾는다

배꼽 밑 단전에다 숨을 멈추고 내쉬는 동안
허벅지 밑 종아리로 개미 몇 마리 스멀스멀 기어간다

일광욕을 즐기다 시간을 놓쳐버린 지렁일
개미 떼가 어디론가 끌고 간다

잠시 감기는 눈을 치켜 떠보니
처마 끝에 풍경은 잠든 지 한참인데
종각 안에 나래 펴는 그녀는 누구인가

청산은 묵묵히 자리 잡고 있는데
백운은 어디까지 떠다니는지

천방지축 허공을 날뛰는 소의 꼬리

언제쯤이면 마음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몸에게 허공을 떠다니라 할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해인海印

바다 한 가운데 찍힌 이름을 보았네
황금 잔물결 고요한데
소국 한 송이 선정에 들었네

활짝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배 불룩하게 내밀고 있는 포대화상은
정지된 포물선을 안고 있네

두 물이 만난다는 족자성 변방
오롯이 피어 있는 백련 한 송이
그 하얀 말씀 바치고 선
강물결도 죄다 푸른색이 아니라네

뜨락에 피어있는 국화꽃 바다 중심주에
찍힌 낙관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샛노란 눈물색으로 물들어 있다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뜨락 뒤편, 뽑으려도 뽑히지 않는
시름시름 앓든 단감나무 그루터기
불현듯 움트는 연두색 새싹처럼

신맛,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
오미의 맛과 멋이란 죄다 내려놓고
세 치 밖에 되지 않는
뭉클한 해삼처럼

북두칠성 동북쪽 자미성 된
장가 못 들고 죽은 외아들이
가시 없는 카네이션 한 송이로 돌아왔을까

허구한 날 밤낮없이 허공을 떠돌다
그녀 가슴 한가운데 꽂힌
오월, 붉은 장미꽃 화살이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안개꽃

한 오라기 여린 몸짓
부서지는 햇살을 베고 누운
아슴푸레 피어오르는 물보라 사랑

안개 너머 희미한 배경으로
멀리 있어도 눈부신 무늬가 되어
서로 어울려 하나 되는 저 꽃

눈앞이 흐려질 때마다
피어나는 한 조각의 기억은
어두운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

메마른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너의 향기에 촉촉이 젖고 싶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아영 시인의 <꽃요일의 죽비>는 인생의 무상함과 각성이 두드러진다. 시인은 영국의 설치미술가인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작품인 신의 사랑을 위하여를 보고 있다. 천만 가지 생각을 죽어서도 떨치지 못한 두개골은 이제 오욕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해놓아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찬란하게 죽어 웃고 있으므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해골무늬로 디자인한 티셔츠와 모자가 팔리고 있는 오늘날의 상업주의 성당과 티베트의 깨달은 자의 해골그릇과 원효선사가 해골에 고인 빗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은 일화가 겹치며 그야말로 일즉다의 인드라망이 현장성 있게 펼쳐진다.
-박수빈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