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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걸린 나-조민자 시집

김남권 2024. 1. 31. 11:36

가시나무 한 그루

조민자

슬픔 하나가
몰래 눈을 뜨고 있다

내 눈물이 키워버린
가시나무 한 그루

줄기차게 피어나는
오월의 줄 장미처럼

방목된 무성한 슬픔들은
폐부 깊은 곳까지 가지를 뻗쳐

심장을 찔러
선명한 핏방울 뚝뚝 듣는데

온 몸을 경련 하면서도
나는 그 아픔을 다스릴 줄 모른다

그대는 남의 일인 듯
시침만 떼고 있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거울 앞에서

거울 앞에 서면
내가 걸어온 길들이 보인다
질곡의 세월을 건너오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날들도 많았지
그럴 때 마다 어머니처럼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거울
눈가에 주름살 잡히는
불혹의 바다에 닳아
나 이제 사
지극한 마음으로 그대를 보네
오래된 비단 천 같이
결이 삭아 가고 있는
내 젊음을 안타까이 바라보네
거울 앞에 앉으면
사랑하고 미워하고 번민하던
한 여인의 생애가 보이네
흙 담 무너지듯
그렇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 보이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구두 한 켤레

아버지 타계 하신 후
신발장 정리를 하다가
뒤축이 닳아버린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한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유행에 뒤떨어진
아버지의 낡은 구두
제 주인을 담아 신고
험한 세상을 항해 했을
한 남자의 족적
가슴이 싸아하게 아려 온다
저녁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닻을 내리던
고단했던 아버지의 한 생애
늦은 저녁상을 차리던
내 여고시절의 모습도
늦게 본 막내 동생의 옹알이도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아버지 살아오신 흔적이 각인 되어 있는
낡은 구두를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신발장 제일 윗칸에 다시 올려놓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대에게 가는 길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어 버렸다
혼자서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대에게 가 보려고 나섰는데
정작 나는 길을 모른다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만
그대에게 갈 수 있는 것일까
이름이나 직업이나 아빠나 남편이나
그런 것이 아닌
진정한 그대의 실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나 날 부르나

창밖에서 젖은 목소리로
누가 날 부르나
밤새도록 창을 가만가만 두드리며
나를 깨우는 이
누가 나대신 젖어
한밤을 저렇게 우는 것인가
갈증으로 목이 타는
대지의 캄캄한 혈관들을 깨우며
흙의 속살을 적시는 봄비
지금 저렇게 소리죽여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것은
나목의 껍질 밑에서
연초록의 어린 꿈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는
소리 없는 아우성인가 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녀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까지 확대되어 앓고 있는 자연에 연민의 점을 보내기도 한다.
그녀가 주로 많이 구사하는 기법은 은유요, 이미지까지 그려내고 있어서 평이한 시어들 보다 생기와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하겠다.
시에서 밝혔듯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뼈를 깎는 각성의 시간을 더 많이 계속할 때 조민자 시인의 앞길은 더 밝고 단단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상철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