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이, 그 시정마-장한라 시집
말들의 휴가
장한라
들뜬 마음 눌러두고
함께 오래 마주 봐야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고생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핥아주며
느긋하게 풍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뒷발굽도 느껴봐야지
마방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안개와
눈 감고도 훤환
부대오름 우진제비오름 길을 지우며
오늘은 조천 바다로
내일은 표선 바다로 미끄러져야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간섭 없는 곳에서
들숨 날숨 껌벅껌벅 눈썹으로 헤아리다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이란 게 어떤 것인지
별이 뜰 때까지 늘어져 맛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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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민들레
나는 까만 민들레
지붕 위에서 산다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땅보다
절망의 바다보다 위안이라
나락의 끝 닿은 곳
겨우 겨우 받은 꽃말, 피 ㆍ난 ㆍ민
빈곤과 내전의 아픔이 살점이 되어버린
푸른 혈맥은 얼룩진 회색 반점
마른 뿌리 깊게 내리지 못해
갈래갈래 꽃잎 흩어지고 찢겨져
차별의 세상에서 살아야 했고
끝끝내 살아 있어야만
타고 흐르는 별빛 한 줄기
낯선 진실은 드러나기나 할는지
어쩌다 까맣게 피었는지
어쩌다 난민으로 올라앉았는지
관심 어린 물음들도 궁극에는
찬란한 한계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곱게만 보지 않는 저들에게
가난하지도 불쌍하지도 않은 나는
지붕 위, 까만 민들레
이대로 당신의 이웃이 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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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묵시록
청정 물결 너머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자체로 신비롭다
무량 세월 씻긴 낮달이 바닷속 정낭을 비출 때
가슴 출렁이며 수문이 열린다
침묵의 바다에 띄우는 상군해녀들의 염원은
생명의 밀어들로 현주소를 불러내고
바다로 가는 길을 읊어주는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이어도
이어도에 우뚝 선 종합해양과학기지
우레와 폭풍이 뒤엉켜 때론 격렬하게 휘몰아치곤
싹쓸이 할퀴며 삼키는 것들을 조명한다
파도가 살아 있어
이어도 키 높이로 살아 넘쳐
나무를 심어 섬을 자라게 하면 좋겠어
평화의 열매를 물고
독도의 온기를 품고서
일천 킬로미터 날아든 괭이갈매기
사철나무를 심겠어요 변함없이 신비로워
바다의 종족들에 햇살 내리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대한민국 최남단
풍랑을 밀어내고 물새알 품고
뿌리내린 사철나무 가지마다 활짝 핀
이어도 만세 만세 만만세
해경 경비함정 3006함, 5002함 한바다로 맴돌다
수많은 섬들의 환호속에 목청껏 외친다
섬이 일어선다 수문이 열린다
이어 이어 이어도가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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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돈지할망당
고통도
지켜보면
삶의 뿌리가
된다
소금바람
휘날려야
푸른 바다
봄 오리니
등 굽은
사스레나무
한 몸 되어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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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이, 그 시정마
혈통과 족보기 없는 태생적 원죄로
쾌감 본능의 질주란
애초에 내 것이 아닌 것
제왕을 위한 정조대 차고
불방망이처럼 달아올라도
수십 번 수백 번
눈부신 신부의 탱탱한 허벅지
헛물켜는 애무와 흥분만이
혀는 말려들고 꽃불 피어나는데
지어 놓은 경희궁
발 들여놓지 못한 광해군처럼
비운의 꼬리표 달고
절정의 순간 쫓겨나
죽일 놈의 운명이라 날뛰어보지만
그녀 발길질에 떨어지더라도
열에 한 번쯤은
계절이 휘어지도록 합방하고픈
애액 흥건한 꿈속
상처가 아문 자리 철원이,
누가 나를 부르면
위로가 닿은 부르튼 나날들 저며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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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라 시인의 시는 그가 공존하는 모든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며 흠과 이면까지 각별하게 배려하고 있다.
시조로 전개되는 짧은 시편들은 함축의 미학을 맛보게 하였고 산문시에서는 거침없는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어 생동하는 시적 발상의 진수를 느끼게 하였다. 시정마 철원이의 운명을 통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허공을 휘젓듯 바람대로 이루지 못하면서도 열연하듯 살아가는 우리의 아픈 모습을 투영해주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다채로운 시적인 용기가 과감한 것을 들여다보며 이후 창작될 장한라 시인의 시를 기대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김필영 시인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