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돌섬 하나 있다-시림 동인
[초대시]
호박
이홍섭
아픈 몸 이끌고 찾아간 시골 약국 담벼락 아래 호박이 실하다
이 세상을 다 쌈 싸 먹어도 남을 것 같은 너른 호박잎이며
이 세상을 다 밝히고도 남을 것 같은 노란 호박꽃처럼 살지못한 삶이 비루하다
호박처럼 펑퍼짐하게 살지 못한 삶이 애틋하다
어머니가 꾼 태몽이 들판에서 누런 호박 하나를 딴 것이라는데
내 불효의 넝쿨은 사방팔방으로 뻗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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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
임동윤
빗줄기 속 어머니는 저 먼 모퉁이에서
지워지는 저녁처럼 서 계셨고
마치 돌아갈 길이 그린 듯 가깝고
승냥이도 호랑이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그렇게 서 계셨고
이슬비에 젖은 나무들도 그 옆에서
서로 손 맞잡고 서 있었고
기다리는 한밤의 막차는 아직 멀었는데
기적 없는 기차역에서 바라보는 나와
박힌 돌처럼 먼 모퉁이에 서 계셨던 어머니,
나 또한 모퉁이를 버리지 못하고
저물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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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해안도로
이구재
저 바다 위로
봄이 왔다 가고
여름도 지나간 후
녹슨 빛깔이 기웃거리면
모진 바람에
등 떠밀려 언덕배기
좁은 골목길 오르는 사내 뒤로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고
깨지고 넘어지면서
파도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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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사회학
김남권
밑을 보지 않은 사람은 불편하다
처음 누군가를 만나면 위만 보여준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힘을 주고
장식을 하고 단장을 한다
그러다 가까워지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나서
드디어 밑을 보여준다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밑으로 시작해서 밑을
보여주며 끝난다
살아가는 동안 가까운 사람의 밑을 보지 않았다면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다
강물도 흐르다 밑을 보여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도 살다가 밑을 보여줄 때,
그 밑을 보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사랑이 완성된다
나무가 밑을 드러내며 옮겨질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도 당당한 건
밑이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땅콩은 세상에 밑을 보여주는 게 송구스러워
땅 속으로 밑이 드는 것이다
위에서 만나 위를 다친 사람들이
밑을 보이며 떠나간 일은 이제 용서하기로 한다
밑져야 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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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시]
게락
김영삼
성난 황소 목덜미처럼 출렁이는 흙물이 징검돌을 뱃속 깊숙이 삼켜버렸다
개울 이쪽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없어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내심 좋아했고
개울 저쪽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어 책보를 흔들면서도 한편 부러워했다
평온한 마을을 두 쪽으로 쩍 갈라놓고도 성에 안 찬 개천은 울그락불그락
'잘 놀아 -'
'잘 갔다 와 -'
이십 리 산길을 걸어 바삐 학교에 갈 아이들이 손나팔 인사를 먼저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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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 동인은 2007년 결성된 강릉지역 동인이다.
그동안 이홍섭 시인을 초청하여 강릉원주대학교에서 시창작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8권의 동인지를 출간하고, 시화전, 시낭송회, 강릉 독서대전에 참여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동인지에는 김영삼, 김은미, 배인주, 한경림, 이순남, 임인숙, 유지숙, 안용진, 황영순, 지은영 등 회원들의 신작시 70여 편이 수록되어 아름다운 서정의 심상을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