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의 산통은 진행형이다-송시월 시집
천년 침묵이 온다
송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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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란 물체의 질료는 무엇일까?
무작위로 유출된 태양을 반입하고 난 어둠이
외로움과 슬픔을 섞어 주조한
냉기로 제련된 또 다른 이름 고독이라는 석상
겨울 품에 웅크린 길고양이의 사색하는 눈빛
단단한 고독의 정수리에 푸른 별빛 한줄기 닿는다
알밤이 티지듯
내 사유의 창들이 토해내는 단말마
실낱같은 인연 몇 줄과 멍울멍울 뽑혀 나오는
온갖 잡념의 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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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침묵
내 영혼의 부동액 방울방울 녹아내리는 눈물
웅~웅~웅~ 퍼져나가는 우주율이다
여러 음역이 겹쳐 태어나는
진동의 결, 내 존재의 소리 꽃
앞산 뒷산 화답하는 공명의 메아리
내게다 무지개를 드리우기도 하는,
눈부시도록 찬란한 고독이 난산한 언어
난산된 언어가 난산하는 칠삭동이 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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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의 산통은 진행형이다
산통을 앓는 간수
죄수를 낳아 두부를 먹인다
세상을 향해 첫발 떼는 죄수, 두부를 먹으며 반듯하고 새하얀 꿈을 꾼다
콩과 몸을 섞은 후 간수는 두부를 조산하고 바다에 투신한다
형체만 흐물거리다가 인큐베이터 안 보자기에 싸여 반듯하게 자란 두부,
자기의 방 안밖으로 흰 페인트를 칠하고 실험실을 만들어 간수를 채운다
죄수를 불러들여 함께 간수 속에서 하얗게 하얗게 탈색되며 부추꽃 모양의
단백질이란 물질로 일렁일렁 피어난다
간수는 이 과정을 태아일기처럼 세밀하게 기록한 후 바다에 투신하며 바닷물에 몸을 씻고 바다와 한몸이 되어 우주를 품는 양수가 된다
간수가 낳았던 죄수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지만 어미가 그리워 바다로 가서 아기고래가 된다
바닷속 하늘엔 고래자리가 뜬다 어미의 양수에선 새끼고래가 놀고,
죄수들이 고래를 잡으러 몰려든다 간수는 죄수들에게 고래를 먹인다
오늘도 산통을 앓으며 다란성 쌍둥이를 수도 없이 분만하는 간수, 신명 난 춤으로 파도를 낳고 죄수와 두부를 낳고 해와 달을 낳고 북극성과 은하수를 낳고 온갖 종류의 물고기와 해초들을 낳고 꽃게와 장둥어를 낳아 뛰고 기고 뛰고 기고 또 낳고 ㆍㆍㆍ낳고ㆍㆍㆍ낳고ㆍㆍㆍ
간수의 산통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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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그림
허공을 떠돌다 착지하는, 저 눈부신 하늘의 난민들
지상에다 단색의 평면을 하얗게 펼친다
하늘과 땅의 혼숙, 그 고요 위를 후들후들 걸어가는 한 여인
깊이 모를 적막으로 미끄러진다
평형이 무너진 내 서식지는
블랙홀인가?
처음과 끝이 혼합된 듯 황홀하고 불안한 이 긴장
온몸은 젖어 끈적거리고
어둠이 어둠을 분만 중인지 비릿한 피 냄새
한 세계가 열린 듯한 진동 소리
샤프란 한 송이 하얗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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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부답
묵, 너는 기관 없는 신체다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인 사각의 침묵들,
귀가 없어 듣질 못하고
입이 없어 말을 못하고
뼈가 없어 서질 못하고
옆구리 맞대고 나란히 앉아 묵언 정진 중이다
나는 이들의 말랑한 사상과 몸의 철학을 묵상하다가
내 감성의 양념을 끼얹는다
나는 너를 먹고 너는 나를 먹고
사각사각 서로를 먹는다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네모가 된 너와 나
한 모 두 모 세 모...
각과 변을 뚫고 나온 선들,
내 안에서 도토리나무가 도톨도톨 자라고 메밀과 청포가 자란다
나는 항우울제로 묵을 먹고
전중혈에 묵침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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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냄새는 시큼하다
나를 어둠에다 반납해야 한다
내게서 서둘러 빠져나간 잠이란 말이 자취를 감추는 저녁
시큼한 먹빛 하늘이 땅에다 입맞춤하며 무언가를 쓰고 있다
센서 등이 고장 난 계단
뼈대도 없이 물컹한 어둠이 나를 와락 껴안아 주저 앉힌다
침을 꽂고 있는
내 척추가 왜 시디신 김치 냄새를 토하는지
검고 신 물체들 씻겨내는 빗소리
누군가가 바꿔 간 대리 우산을 펼친다
잔구멍으로 새어드는 빗방울 알약들
마그네슘이나 트립토판이면 좋겠는데
침묵의 파편들이 유형처럼 어른거리는 유리창
어둠의 고랑으로 우주의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시곗바늘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마그네슘을 찾고 있고
나는 오렌지를 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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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호흡의 난해한 문장이야 어둠을 겹겹 껴 인은 복병들, 저들도 나를 복병으로 생각하는지 숨죽이고 있군. 새들은 천의 소리만의 소리로 울어 쌓는데, 나는 복이란 글자에 슬그머니 호기심이 이는군, 복병, 너희는 나를 병복으로 갈아입히려 사방에서 바싹 다가서는 느낌이야, 복과 병이 어디쯤에서 악수를 할는지, 그 입구만 찾으면 의외로 쉽게 밤하늘의 그 불가사의한 별의 성분을 맛볼 것도 같은데 실체를 알 수 없는 저 검은 기호들, 나도 모르게 나팔꽃처럼 휘감아 오르는 그 비의를 알 것도 같은데 복병과 병복을 섞어 조율하면 율격이 힘차고 멋진 울림의 문장으로 태어날 것도 같은데, 빛과 어둠이 손 흔들며 조용히 작별 인사를 나눔 때쯤이면 너는 검은 갑옷을 벗으며 활짝 웃겠지
지금은 월식 중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