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인향만리 죽향만리-조선의 시집
분향리 석불입상
조선의
탑신에 이끼가 돋아났다
뜬 눈으로 천년을 꼿꼿이 선
석불 내부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나는 지금 없는 아버지와 동거중이다
쓸모없는 돌로 무엇을 증명하려는지
세월을 되질하듯 어둠을 캐는 아버지는
더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불면을 흘려보냈다
수 세기에 걸쳐 깊어진 선불은
상처 입은 마음을 살피는 이 땅의 은자
가까워지는 걸음으로 속세를 향해 귀를 세우고 있다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의 자학에서 빠져나왔으나
마음의 빈터마다 눈먼 남루가 극성을 부렸다
머리 꼭대기에 불을 밝힌 아버지는
타는 해를 삼켜버린 돌덩어리, 돌덩어리
숨 막히는 불안을 떨쳐내고 눈을 뜨니
몸 안으로 구름 같은 나비 떼가 날아들었다
생존의 늪을 건너는 참회의 눈물 한 방울로
아버지는 꺼지지 않는 목숨에 닿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 내리는 연계정
소복이 영산홍 꽃가지에 눈이 내린다
덧니처럼 반짝 빛나는 자리
쌓인 눈을 가만히 헤치고 걸어 나오시는 어머니
무명 치마 짓는 날은
광목천을 돌확에 박박 치대
세속의 잡다한 색을 다 빼내고서야
몸에 두르고 옷고름을 매셨다
온전히 하얀색 하나 얻기 위해
밤이면 달빛에 곱게 풀을 먹여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두들기기를 반복했다
생의 갈피마다 소담했던 한 집안의 내력
생각지도 않은 일에 가산은 층층 가라앉았다
눈 질끈 감았던 순간이 한두 번이겠는가
속으로 삭이는 일이 많아질수록
당신의 발등에 소금 한 줌씩 뿌리곤 했다
새 울음소리마저 하얀 오늘
어머니 가슴을 까맣게 태운 나는, 이 눈이 다 녹아도
옥필로 쓴 연계정 이야기는 다 읽을 수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소쇄원에서
정신 혁명을 감행했는지
양옆으로 도열한 대나무는 꼿꼿하다
맑은 슬픔조차 어쩌지 못해
마른 가슴에 한을 봉하던 시절에도
눈부신 절망이 이마에 손을 얹게 했다
푸른 피가 솟구칠 것 같은 지금
사람 없이 생각이 깊은 광풍각을 향한다
대나무는 서로의 속사정을 달래며
올곧은 자세를 고수했으나
큰 사람을 잃고 천둥처럼 울었다
반쯤 몸을 열다 만 낮달이 제월당을 넘고,
매화나무는 땅 속에 밑불을 넣어두었는지
우르르 몰려나와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트린다
한 세월 멀리 던져버리면, 막다른 눈물 한 줄기는
계류가 되어 흘러내리는 소쇄원
묶여 있던 시간이 광풍각 문고리에 손을 올린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병풍산을 오르다
산맥을 끊지 마라
빨리 흐르라고 강물을 다그치지 마라
서로 손잡고 저들의 마음에서
조곤조곤 사랑이 싹트고 있음을 안다면
설령 어느 누구와도
산에서는 언쟁하지 말 일이다
구부렁구부렁 맥을 잇는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은
파닥이는 그늘을 훼손하는 일
등고선 밖으로 새를 몰애내는 일
허투루 높이를 가지지 않는 산
계곡이 깊고 수려한 곳에 머무르면
병풍산은, 세상 이야기도 들려주고
타인들과 어울리는 법도 일러준다
담양의 배꼽 부근에 병풍을 친 산
근심이 있다면, 믿음과 말의 간격을 좁히며
오솔길을 따라 걸을 일이다
허황된 욕심을 아직 내려놓지 못했거든
맨몸으로 솟아오르는 산을 쳐다보라
어떤 경우도 얼굴도 돌리지 않는
저 장엄한 모습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궁화동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가 바람의 술래처럼 사라진 뒤에도
뒤돌아본 자리에 무궁화는 피었다
눈병 오르는 꽃이라고
귀가 가렵도록 듣고 자란 아이들은
무궁화만은 함부로 꺾지 않았다
어린 꿈이 새들의 날개 위로 파닥거릴 때부터
한 호흡씩 크게 부르는 소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떠 있는 별 하나 가슴에 담지 못하던 시절에도
모두가 잠든 밤 불꽃을 밝혔다
어두운 땅속 밑뿌리들끼리 닫힌 말 문을 열듯
살갑게 살아남은 꽃
혼자서는 다 끌어안지 못해
가슴 맞댄 그 정신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다섯 꽃잎 속 둥근 수화로 펄럭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시집은 담양을 사랑하는 조선의 시인이 몸소 시가 된 담양의 헌사가 아닐까,
담양에 있는 유물들로부터 사라진 것들을 상상하고 나아가 그 상상을 통해 사라진 것들이 말하는 바를 들으며 이를 기록하고자 하는 시작 태도, 다시 말해 담양의 유물들이 은밀히 말해주는 사라진 것들로부터 시인은 시 쓰기의 영감을 얻고 있다.
오랜 시간 보존된 자연물이나 역사적 유물이 많은 담양은, 저 동강처럼 고단한 여정을 마진 존재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존재자들이 여정을 통과하면서 상기한 것들을 침묵 바깥으로 내놓는 고장이 담양인 것이다. 시를 품고 있는 존재자들이 오래도록 보존되어 있는 담양, 사물의 침묵 바깥으로 나온 말들을 들으면서 시를 쓰는 사람인 조선의 시인에게, 담양은 시를 어디서나 길어 올릴 수 있는 시의 우물이라 하겠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